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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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선사에서 현대까지 강화도 역사기행 조회수 : 106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9-10-20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행주산성
사적 제 56호

정확한 축성연대와 축성목적을 알 수 없는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덕포진
사적 제 292호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와 마주하고 있는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이다.



덕포진을 산책하고 있는
2차 기행팀의 아이들이다.



손돌의 묘

고려 고종이 강화로 몽진할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했는데, 고종은 그를 몽골의 첩자로 오인하여 죽였지만 손돌은 죽어서도 왕을 안전하게 강화도로 인도했다는 슬픈 전설이 얽힌 묘이다.



초지진
사적 제 225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는 물론, 운요호사건 때도 일본군과 맞서 줄기차게 싸운 전적지가 초지진이다. 사진의 소나무는 외적이 쏘아댄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제국주의 침략을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덕진진
사 적 제 226호

덕진진의 남장포대

덕포진 포대와 더불어 강화 제1의 포대였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덕포진 포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여 심한 피해를 입혔으나, 끝내 병기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덕진돈대

덕진진에 속한 두 개의 돈대 가운데 하나인 덕진돈대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대원군의 경고비

덕진돈대의 남쪽 염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이 경고비는 1876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광성보
사적 제 227호 

고려 때는 물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외세가 밀어 닥치던 당시의 강화도엔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군 편제를 오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휘부였던 <진>이 대대급이었다면, <보>는 중대급, <돈>은 분대급의 초소였다고 볼 수 있다.



광성보의 쌍충비

신미양요 때 미군은 9인치 대포를 쏘아 댔으나 우리는 정조준도 안 되고 사정거리도 형편없었으며, 포탄이 날아간 후 폭발되지도 안는 쇳덩어리를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광성보에는 약 1000명의 조선군이 있었으나, 1시간 30분의 포격에 거의 죽고 수(帥)자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계양되었다.

이때 중군장이었던 어재연장군과 아우 어재순은 ‘적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고 결의하고 이틀 동안 사투를 벌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 형제의 순국을 기리는 쌍충비가 서 있다.



신미순의총

쌍충비가 서 있는 길 아래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4명의 시신을 나누어 뭍은 7기의 분묘가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용두돈대

광성보에서 해안의 성터를 따라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은 전적지답지 않게 숲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갑곶돈
사적 제 306호

갑곶돈대의 탱자나무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던 정묘호란 때 성곽을 보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도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성곽 주위에 탱자나무를 촘촘히 심었는데, 그 가운데 한그루가 외롭게 남아 있어 400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갑곶돈대

온 나라를 쏙대밭으로 만든 몽골군은 염하의 물살을 두려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한 채 건너편 문수산에서 내려다만 보고 있었으니 천연의 요새임에 틀림없으나 병자호란 때 조선의 군사들은 물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으니 아무리 천혜의 요건을 갖춘 요새라도 지키는 사람이 부패하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는 곳이다.



금속활자 기념비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한 것은 독일 구텐베르그(1450년) 보다 216년이나 앞선 1,234(고종21년)에 강화에서 몽골과의 전란 중에 권신?최우가 주자로 찍어낸 고금상정예문(古今祥定禮文)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1372년에 펴낸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선원사터
사적 제 259호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제작된 곳이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지휘 감독했던 대장도감의 본사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절이 있던 터이다.



이규보의 묘

백운 이규보는 고려의 문호로서 1191년(명종 21) 진사시에 합격한 뒤 권신, 최우의 신임을 받아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고려 고종 28년 몽골이 침입했을 때 임금을 모시고 이곳 강화도에 왔다가 74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정족산성 삼랑성
사적 제 130호  <![endif]>

성의 축조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단군의 세 아들(부여, 부우, 부소)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성 혹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 석성의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양헌수승전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26호

양헌수가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부임하던 해에 프랑스 로즈 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10월3일 로즈가 보낸 해군 대령 올리비에 부대 160명이 침범하자 이들을 맞아 싸웠다. 이 전투에서 적군 6명을 사살하고 29명의 부상자를 내는 전과를 거두고 적의 병기를 다수 노획하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 군이 패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진은 이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당시 조선군은 사망1명, 부상 4명이었다.



전등사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가 창건하여 진종사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30대 충정왕 때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전등사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진리의 등불을 전한다는 불교본래의 의미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에게 <대장경>을 찍어서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정족산사고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니산 사고가 불타 없어지자 새로 지은 것이다. 특히 효종 이후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장소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1678년(숙종 4)에 실록이 옮겨졌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마니산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이라고도 하는데,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69.4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과 영종도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꼭대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있다.



마니산 등산

마니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여러군데가 개발되어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상방리의 관리사무소를 출발해 개미허리를 통과하는 길이다.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임금이 천제를 올리러 오르내리던 길이라는 의미는 있으나 꼭대기까지 이어진 918개의 계단이 있어서 쉽지 않은 코스이다. 역사기행 1,2차 팀은 단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정상을 정복하였다.



강화산성의 서문(첨화루)

강화산성에는 동, 서, 남, 북문이 있는데, 서문인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다.



북문(진송루)

북문인 진송루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 4개소와 수문 2개소가 남아 있다.



고려궁터
사적 제 133호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머물던 왕궁 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 건물이 세워졌다.



강화유수부 동헌

고려궁터 안에 있던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동헌에는 영조 때 명필이었던 윤순이 쓴 명위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방청

이방청은 12칸 대청에 8칸의 온돌방을 갖춘 큰 건물로서 이(사무, 비서), 호(세무, 회계), 예(제사, 손님접대), 병(군사), 형(경찰), 공(토목공사) 6방 중의 하나인 이방이 사무를 보던 곳이다.



강화동종
보물 제 11호

이 종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 형태에서 벗어나 횡대를 두른 이례적 형식을 취하였고,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에 음관이 없는 점 등으로 조선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외규장각

고려궁터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귀중한 소장품들을 약탈당하고 건물까지도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빈 건물만 쓸쓸히 서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
사적 제 424호

대한성공회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데, 전통적인 한옥구조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해 1900년 11월 15일에 세워진 건물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만난 아름다운 건물인 강화성당은 경복궁을 지은 도편수에게 건축을 맡겨 백두산 소나무를 뗏목으로 운반하여 지었다고 한다.



김상용순의비
인천광역시기념물 제35호

김상용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림대군, 비빈, 원손과 함께 강화에 내려와 있었으나 이듬해 1월 강화성이 함락되자 손자와 함께 남문에 올라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이때 그를 따르던 선비들과 노비들도 불로 뛰어 들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청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순국한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삼학사의 한 사람인 김상헌의 형이기도 하다.



용흥궁
인천유형문화재 제 20호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으로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이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터에 세운 건물이다.



연무당옛터

연무당은 원래 강화진무영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으로 열무당이라고 했다. 원래는 강화 농협지부가 있는 자리에서 이곳 서문의 너른 터로 이전해 온 것은 고종 7년(1870년)이었다.

그 후 1876년 2월, 국방의 의지가 한껏 드높여 져야 할 이곳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뼈아픈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석수문
인천 유형문화재 제 30호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 1711년(숙종 37)에 축조되었다.



강화고인돌
사적 제137호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강화도에는 이 고인돌 외에도 송해면과 하점면에 걸쳐 고인돌군이 있는데, 고려산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에서 그 기슭의 평탄한 대지에 이르는 지점에 약 20∼30기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 고인돌과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볼 때 강화에는 약 2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강화고인돌은 들판 가운데에 1기가 독립해 있는데,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이다.



강화 평화전망대

민통선 안의 제적봉에 있는 전망대로서, 남한에서 북한을 가장 가깝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넓은 한강 하구 건너편으로 북한 개풍군 일대가 손에 잡힐듯 바라보이며, 멀리 예성강 하구와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인 황해도 연백군 일대까지 조망할 수 있고, 날씨가 맑으면 개성 송악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오상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이곳의 고인돌군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대형 판석 한 장을 덮은 모양으로 고인돌의 돌방(석실) 축조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외포항과 삼별초

몽골에 항복한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군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반 몽골항전을 주장하는 삼별초군은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옮겨 진도에 정부를 수립하고 몽골과 고려정부에 저항운동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삼별초군이 강화도를 떠난 곳이 외포항이다.



강화 갯벌

갯벌은 조류로 운반되는 모래나 점토의 미세입자가 파도가 잔잔한 해역에 오랫동안 쌓여 생기는 지형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은 만조 때에는 물속에 잠기나 간조 때에는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며 퇴적물질이 운반되어 점점 쌓이게 된다.



강화 갯벌

우리나라 총 갯벌 면적의 83%가 서해안 지역에 분포하며,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부 해안과 북해 연안, 아마존 강 유역과 더불어 세계의 5대 갯벌로 꼽힌다. 과거에는 간척·매립사업의 대상이었으나, 최근 생태적 가치 등이 밝혀지면서 보존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갯벌 1K㎡는 인구 10만 명이 배출하는 오염물질을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임진각

임진각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다. 이곳에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평화누리공원이 조성되었다.



철도종단점

1945년 8월, 일제 식민지의 사슬에서 해방됐으나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됐으며, 60년 이상을 반목과 질시 속에서 보내고 있다. 마치 이러한 대립을 상징하듯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2리, 경의선이 끊어진 지점에 서 있는 철도중단점 푯말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We want to be back on track)”라고 적혀 있는 푯말이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망배단

실향만을 위하여 1985년에 세워진 제단이다. 휴전선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많은 실향민들과 가족이 추석이나 설날에 고향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이곳에서 차례를 지낸다.



자유의 다리

통일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나무다리인데, 1953년 전쟁포로를 교환하기 위해 가설한 것이다. 이 다리의 남쪽 끝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글이 적힌 수많은 리본이 걸려있다.



반구정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백리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하여 말년을 즐기던 정자 반구정이 있다. 임진강 가에 섬처럼 홀로 서 있는 산이 있어서 묘한 경치를 이루는데, 그 가파른 언덕 위에 강물을 접하여 사방 한 간의 4각형 정자 반구정이 있고, 그 옆으로 좀 더 높은 언덕 위에 8각 정자 앙지대가 있다.



화석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1호

노송이 우거지고 바로 앞에는 임진강이 활처럼 휘돌아 흐르는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그 아래 마을이 밤골(율곡)인데, 이이선생의 호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율곡선생이 강릉 외가에서 올라와 어린 시절 자연을 즐기며 공부하던 곳이요,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제자들과 시문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곤 하던 곳이다.



자운서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7호

 

율곡선생을 모신 자운서원은 기호사림(경기, 충청지역)의 본산으로서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과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현석 박세채를 함께 배향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여기에만 배향된 것이 아니라, 그 아들 김집과 더불어 부자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율곡선생의 가족묘

율곡의 묘는 서원이 있는 자운산의 골 안에 있다. 우거진 숲속, 멀리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능선에 율곡의 부모 묘를 비롯한 13기의 묘가 가족묘역을 이루고 있다.



덕은리 주거지와 고인돌군락
사적 제 148호

덕은리 옥석동 마을의 구릉지대에는 20여 기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 이들 고인돌은 한두 기씩 능선을 따라 위치하며, 10여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무리를 지으며 분포하기도 한다. 고인돌 아래쪽에서 두 채로 추정되는 집터가 발굴되었다.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결과 이 집터는 기원전 10∼5세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서오릉
사적 제 198호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서오릉은 5기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오릉 지역이 능 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1457년(세조 3)에 세자가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서오릉은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릉

세조의 세자 장과 그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세조는 추존 덕종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고, 왕비는 생전에 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어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다.



명릉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으로 조성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조선의 왕릉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하였는데,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였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의 무덤을 원,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묘라고 불렀다.

조선왕릉 42기 가운데 건국초기에 조성되어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1대 태조 왕비(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의 후릉을 제외한 대부분은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고유한 풍수사상과 엄격한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가 차원에서 성스럽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완정성을 갖추었음은 물론 대부분은 그 원형이 제자리에 잘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은 명릉(숙중과 인현왕후)의 모습이다.



여행을 마치며

1차 때는
희뿌연 안개 때문에
아침나절이 힘들었는데
2차 때는 갑작스런 추위 때문에
쉽지 않은 여행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한 여행이
한해 두해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는 이골이 났지만
나와 아이들에게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이 땅을 휘젓고 다니는 여행은
여전히 힘들다.
아니
이 땅의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 힘들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역사의 미래를
자랑스럽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해 본다.
저 길 끝에 그 미래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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