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산과 바다와 역사 동해안 역사기행 | 조회수 : 1792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9-04-27 |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영월 선돌
영월의 서강 가에 자리 잡은 높이 70m 정도의 큰 바위를 선돌이라 하는데,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한다. 선돌은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선돌로 올라가는 오솔길
전에는 이 오솔길이
숲속으로 난 작은 길이었는데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길을 따라 나무계단을 만들었다.
이런 작은 배려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영월 낙화암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이 1457년(세조 3)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와 시종들이 이 절벽에 올라 금장강(동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의 시신도 이곳에서 강으로 던져졌다 한다.
낙화암의 금강정
1428년(세종 10년)에 김복항이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건립하였다는 정자인데, 1684년(숙종 10)에 우암 송시열이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고 한다.
낙화암의 민충사
단종이 상왕일 때부터 단종을 돌보던 종복과 궁녀들이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낙화암에서 금장강(금강, 동강의 지류)으로 몸을 던졌는데,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영월 봉래산
영월 8경의 하나로 단종을 복위 시키려다 실패한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시조에 나오는 산이 봉래산이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이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하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야이셔
白雪이 滿乾坤할졔 獨也靑靑 하리라
관풍헌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관풍헌은 영월 시내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조선초기의 동헌의 객사이다.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이곳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졌고, 관풍헌의 앞 마당에서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왕방연 시조비
왕방연은 조선시대 문신 겸 시인인데, 세조 때 금부도사로 있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1457년(세조 3) 왕명에 따라 상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영월로 귀양 갈 때 호송하였다.
왕방연이 왕명을 받들어 단종의 귀양길을 호송하는 책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마주보는 강 언덕에서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청령포
명승 제 50호
청령포는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17세에 죽음을 맞은 단종이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겨서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생활하던 곳이다. 삼면이 강줄기로 싸여 있고 뒤로는 험한 산줄기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청령포 들어가는 나룻배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 쌓여있고, 서쪽은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다.
단종어소
단종어소는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이 머물던 집인데,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는데, 승정원 일지의 기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관음송
청령포에는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의 소나무는 단종의 슬픈 눈물을 보고 들었다하여 관음송이라 한다.
청령포의 솔숲
청령포에 위치한 이 소나무 숲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소나무가 들어찬 숲으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울창하게 들어차 있다.
망향탑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모아 쌓았다는 탑이다.
장릉
사적 제196호
조선조 제6대 단종 대왕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에 탄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있던 중, 세조 2년 성삼문 등이 꾀한 상왕복위계획이 탄로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세조의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장릉 홍살문
궁전·관아·능·묘·원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나무문이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태백 석탄박물관
석탄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유일한 에너지 자원으로 국민생활을 위한 연료공급과 국가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 국가경제 발전에 크기 기여한 연료이다. 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었던 석탄의 역할과 그 역사적 사실들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전시한 곳으로,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지하전시실 1개, 옥외 야외전시실 각 2개 등을 갖춘 세계 최대의 석탄박물관이다.
석탄박물관의 화석전시실
석탄박물관은 화석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을 만져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을 많이 만들어서 아이들로 하여금 생동감있는 박물관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미인폭포
옛적에 폭포 옆 높은 터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콧대 높은 미녀가 신랑을 고르다가 나이가 들었는데, 한번은 마음에 드는 총각이 나타나 결혼을 하려하니, 그 총각이 이르기를 할머니가 무슨 농담이냐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물에 비춰보니 할머니처럼 늙어버린 처녀는 절망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폭포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교만하면 낭패를 본다는 교훈을 주는 폭포이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통리협곡
한국판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미인폭포 주변의 통리협곡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신생대 초의 심한 단층작용으로 강물에 침식되어 270미터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색을 띠는데, 이것은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퇴적층이 공기 중에서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역암(자갈)과 사암(모래), 이암(진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세월 퇴적한 흔적이 뚜렷하다.
신리 너와집
중요민속자료 제33호
강원도에서는 느에집 또는 능에집이라고도 하는 너와집은 200년 이상 자란 붉은 소나무 토막을 길이로 세워 놓고 쐐기를 박아 쳐서 잘라낸 널판으로 지붕을 얹은 집이다. 널판(너와)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가로 20~30cm, 세로 40~60cm정도이며, 두께는 4~5cm이다.
굴피집
중요민속자료 제223호
나무껍질을 이어 만든 지붕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시용되었으며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일대를 비롯한 산간지방 화전민들의 가옥에 널리 쓰였다. 굴피는 참나무·굴참나무·상수리나무 등의 껍질을 사용하여 만들며, 수명이 길어 예로부터 20년에 한 번씩 바꾸어 이었다고 한다. 겉모양은 거칠어 보이나 매우 가벼우며 지붕 재료로는 20년 이상 자란 나무를 쓴다.
통방아
통방아란 물의 힘으로 공이를 오르내리게 하는 방아를 말하는데, 곳에 따라 벼락방애라고도 부른다. 벼락방애는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크다는 데에서, 통방아는 방아 자체를 통나무로 파서 만들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환선굴
천연기념물 제178호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석회암 동굴인데, 주굴 길이는 약 3.3km이고, 총길이는 약 6.5km로, 고생대 캄브리아기(약 5억3천만년전)의 지층에 발달된 동굴이다. 동굴은 대체로 북향으로 전개되며, 안쪽 80m 지점에 둘레 20여m의 거대한 석주가 서 있고, 그곳에서 북 굴·북서 굴·중앙 굴·남 굴의 4갈래로 갈라진다.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노년기 동굴인 환선굴은 종유석의 발달이 퇴폐적이나 윤회재생의 과정에 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동굴류의 발달이 탁월하며, 동굴동물도 많이 서식하고
환선굴
한국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대이리동굴지대에는 환선굴·관음굴·제암풍혈(사다리바위바람굴)·양터목세굴·큰재세굴 등이 흩어져 있는데 모두 합쳐서 대이리동굴지대라고 한다. 그 가운데 해발고도 500m 지점에 있는 환선굴이 가장 규모가 크다. 동굴내부는 대단히 큰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관람로는 철제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동굴생성물이나 동굴생물을 살펴보기 좋다. 위의 사진은 용식지형이 하트모양으로 발달한 것이고, 아래의 사진은 동굴내부의 모습이다.
환선굴
석회동굴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종유커튼을 비롯하여, 종유관, 종유석, 석순, 석주, 동굴진주, 동굴산호 등이 발달하며, 박쥐를 비롯하여 장님새우, 곱등이 김띠노래기,도롱룡 등의 동굴생물이 살고 있다.
삼척 죽서루
보물 제213호
이 누각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학자인 이승휴가 고려 원종 7년(1266) 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한 이래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는 자연 그대로를 살린 건축물로도 유명한데, 누각 아래의 돌덩이 하나도 캐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건물을 지어 올렸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의 용문바위
문무왕이 바다를 지키는 용이 되었는데, 오십천을 지나다가 주변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쉬다가 바위를 뚫고 승천했다고 한다. 그 곳을 들어가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해암정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63호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낙향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한림원사 등을 역임하고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때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東老) 즉,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촛대바위(추암)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곳의 바위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체찰사로 있던 한명회는 이 바위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라고도 하였다.
촛대바위(추암)
바다에서 솟아 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해돋이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정동진
한양의 <광화문에서 정동 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부락〉이라하여 정동진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신라 때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2,000년에는 국가지정행사로 밀레니엄 해돋이축전을 성대하게 치른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정동진역
정동진 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TV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잘 알려지자 청량리역에서 해돋이열차가 운행되면서 유명한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강릉 객사문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로서 관리들과 더불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던 곳이다. 이런 기능 때문에 객사는 관아의 형식과 주택의 형식을 절충한 형태로 지어졌고, 중앙에서 오는 관리들을 위한 건물이기 때문에 해당 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졌다. 강릉의 객사문은 작으나마 고려시대의 주심포 건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물로서 아름다운 비례와 구조를 가진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강릉 향교
강릉향교는 경사지형을 이용한 독창적인 건축물이며, 지방향교로는 거의 완벽한 규모와 기능을 갖춘 유교식 건축물이다. 향교는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강릉향교의 대성전
보물 제214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구조를 갖춘 홑처마의 맞배집으로 엄숙성과 절제성이 훌륭하게 구사된 건물이다.
허난설헌*허균생가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네 자녀를 두었는데, 허성?허봉?허균 그리고 초희(난설헌)는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이름난 재사요 시인이었던 그의 형 허봉은 당쟁에 밀려나서 갑산으로 귀양 갔다가 5년 후에 풀려났으나 38세로 세상을 마감했으며, 누이인 난설헌과 허균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허난설헌
여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아름다운 용모의 천재 여류시인 이었던 난설헌은 명문출신의 선비 김성립에게 출가하였으나 자녀를 모두 잃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글과 그림이 아름다워 중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이다.
허균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허균은 순탄치 못한 벼슬길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50세의 나이에 능지처사를 당한 애석한 인물이다.
경포대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
경포대는 원래 1326년(충숙왕 13)에 강원도의 관리였던 박숙정이 방해정 뒷산에 세웠는데,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포대
경포대에 앉으면 달이 다섯 개가 떠오른다고 한다. 하늘에 떠있는 달,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 바다의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 정자 위에서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 속의 달, 마주 앉은 벗과 님의 눈동자에 깃든 달이 그것이다.
경포대의 주변으로는 선교장의 부속정자인 방해정을 비롯하여 해운정, 금란정, 경호정 등 12채의 정자가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경포호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과 같이 청정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호수 주변의 풍광이 뛰어나서 경포대를 중심으로 누정이 산재해 있고(경포대, 해운정, 경호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석란정, 창랑정, 취영정, 상영정), 경포해수욕장 및 주변에 울창한 송림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날에는 둘레가 12km나 됐다고 하나 지금은 4km 정도로 줄어들었다.
강릉 선교장
중요민속자료 제5호
선교장은 17세기 초, 경포대주변의 저동에 살던 효령대군 11대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로 옮겨와 집을 짓고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가옥들은 처음부터 계획 하에 건축되기 보다는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었으나, 다른 상류 주택에서 볼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선교장의 활래정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서 건물 일부가 물에 떠있는 형상이며, 벽은 온통 문으로 구성하여 문을 열면 정자 속에 앉아서도 자연과 하나가 된다.
선교유거
본채에는 바깥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고, 행랑채 중간에 솟을 대문이 자리 잡고 있는데, <선교유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계단이 없이 경사진 출입구로 되어 있으며, 노송과 잘 어우러져 있다.
선교장의 사랑채 열화당
대청, 사랑방, 침방, 누마루가 결합된 사랑채로서 툇마루 앞에는 햇볕을 막도록 차양을 설치하였는데, 개화기에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장식효과도 염두에 둔 장치이다.
선교장의 행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문
길게 배열된 행랑채 끝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동별당과 안채가 나온다. 원래는 동, 서 별당이 있었는데, 서 별당은 없어지고 동 별당만 남아 있다.
김시습 기념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도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무우뢰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심상진 가옥
강원도유형문화제 제79호
해운정 오른쪽에 맞붙어 있는 심상진 가옥은 심언광의 후손이 지은 살림집인데, 안채는 해운정보다 100년 뒤에, 사랑채는 150년 뒤에 지어졌다. 강원도 지역 민가의 구조인 겹집에 사대부집 구조인 ㅁ자 형태를 결합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집이다.
해운정
보물 제183호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 잡은 조선 초기의 정자건축물인 해운정은 심언광이 중종 25년(1530)에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별당형의 정자이다. 해운정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이 쓴 것이라고 한다.
해운정은 자연석으로 쌓은 3단의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간결하면서도 소박하게 지어졌다. 정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으로는 정원수를 심었으며, 솟을대문에 이르기까지는 마당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오죽헌
보물 제165호
오죽(검은 대나무)의 대숲과 소나무 숲이 호위하듯 둘러 있고, 앞뜰에는 석류 능소화를 비롯하여 철따라 갖가지 꽃을 피워대는 오죽헌은 별천지와 같은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율곡이 태어나고 자랐다.
오죽헌의 몽룡실
몽룡실은 율곡이 태어난 태실이다. 율곡은 3세에 이미 말과 글을 알았는데,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이냐?" 하고 묻자, 어린 율곡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石榴皮 碎紅珠 석류피 쇄홍주)" 라는 옛 시 귀절을 읊어 대답하였다고 한다.
13세에는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21세에는 한성시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는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기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급제한 분)'이라 불렸다.
오죽헌 안채의 정원
오죽헌 오른쪽의 작은 문을 지나면 안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정원을 지나 샛담을 끼고 나가면 정조 임금이 1788년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 원본과 벼루를 보관하도록 지어준 어제각이 있다.
오죽
오죽헌 뒤뜰에서 자라는 대나무의 색깔이 까마귀처럼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대가 아름답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심고 또 성숙한 것은 여러 가지 죽세공품의 재료로도 이용한다.
김동명 시비
1920년 함흥 영생중학 졸업 후에 흥남, 평남 강서 등에서 소학교 교원생활을 하였다. 1925년 일본에 건너가서 아오야마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간행하였다. 1938년 제2시집 <파초>를 간행하였는데, 이 중 〈파초〉는 남국을 떠나온 파초와 조국을 잃은 자신의 향수를 융합시켜 읊은 것이다. 1947년 월남하여 1960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참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양양 낙산사
낙산사 의상대는 문무왕 11년(671)에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은 기도를 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나 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법당을 지은 후 낙산사라 하였다. 왜국의 침입이 잦았던 당시 범어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나라의 안녕을 위해 동해를 바라보며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서린 의상대이다. 고승은 가고 그 자리에는 그를 기리며 동해의 풍광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누각이 세워졌다.
양양 산불의 흔적
2005년 4월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의 유서 깊은 문화재는 물런 이 일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대포항 등대
등대는 BC 280년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항 입구의 팔로스섬에 최초로 건설되었는데, 높이가 110m나 되는 탑 모양의 것이었으며, 나무나 송진을 태워 불을 밝혔다고 한다. 항해술의 발달과 더불어 등대의 성능도 개량되어 19세기에는 근대식 형태의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도 옛날부터 항로변의 산·섬에서 봉화를 올려 등대의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말에 인천항에 처음으로 양식등대가 건설되었는데, 그 후 많은 발전을 보여 1962년 국제등대협회에 가입하여 A멤버 회원국으로 되어 있다.
대포항
일제강점기 때 작은 포구로 생겨난 이곳은 설악산과 동해안이 전국적인 관광지로 탈바꿈하면서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시작하자, 어선들도 덩달아 늘어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배를 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어선들이 항구에 가득 차서, 새벽녘이면 고기를 잡아 항구로 들어오는 어선들로 북적인다.
대포항 수산시장
오늘날의 대포항은 전문 어항으로서보다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관광어항의 성격이 짙으며 항구로 들어오는 진입로 양 옆에는 500여 미터에 걸쳐 건어물 가게와 횟집이 늘어서 있고, 노점상들도 줄지어 늘어서 있다.
청간정
강원 유형문화재 제32호
관동8경의 하나인 청간정은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작은 구릉 위에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풍경이 일품이다. 특히 아침의 해돋이광경과 낙조의 정취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으나 1520년(중종 15)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30년경에 지방민들이 재건하였다
청간정 앞바다(동해)
동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서 기원전 37년에 해당하는 고구려 동명왕에 대한 기술에서 처음 보이며,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동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이는 8세기부터 사용된 일본이라는 국호보다 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에 제작된 고지도에서도 동해라는 명칭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민통선
1953년 7월 27일 미국·중국·소련에 의해 155마일 휴전선(군사분계선)이 그어지고, 이 선에서 남북이 똑같이 2㎞씩 뒤로 물러나 이 지역을 비무장지대로(DMZ)로 정하였다. 그리고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민통선이라고 부른다.
민통선
민통선이 그어진 후 이 지역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오다가 1990년대 들어 민통선의 범위를 북쪽으로 상향 조정하였으며, 민통선 안에서도 인근 주민들이 군사시설보호법에 따라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농사도 지을 수 있도록 통제가 완화되었다.
금강산과 해금강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최단 16㎞, 최장 25㎞밖에 되지 않아 일출봉(1,552m)·월출봉·채하봉(1,588m)·육선봉과 집선봉·세존봉·옥녀봉(1,424m)·신선대·관음봉 등 금강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고봉인 비로봉은 맑은 날에만 보인다. 해금강은 더욱 가까워 만물상·부처바위·백바위·구선봉 외에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로 유명한 감호 등 해금강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가지 못하는 관동팔경
관동팔경 가운데 신라시대의 매화랑이 하루만 놀다가려고 왔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삼일간이나 놀다갔다는 삼일포,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던 총석정과 삼일포는 북녘의 땅에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설악산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1호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인 설악산은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향로봉·금강산, 남쪽으로는 점봉산·오대산과 마주한다. 최고봉은 대청봉(1708m)이다. 대청봉 남쪽에 한계령, 북쪽에 마등령·미시령 등의 고개가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위치상 산맥의 서쪽 인제군에 속하는 지역을 내설악, 동쪽을 외설악으로 나눈다. 내설악의 명승지로는 647년(신라 진덕여왕 1)에 창건된 백담사를 비롯해 대승·와룡·유달·쌍폭 등의 폭포와 수렴동·가야동·구곡담 등의 계곡, 그리고 옥녀탕 등 이름난 곳이 많다.
권금성 정상과 설악의 봉우리들
외설악은 관모산·천불동계곡·울산바위·권금성·금강굴 외에 비룡폭포·토왕성폭포·귀면암·와선대·비선대 등 기암괴석과 계곡이 절경을 이룬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2년 8월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는 등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보존지역·관광지로도 이름이 높다.
권금성
둘레 약 3,500m의 성인데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다. 설악산 케이블카가 다니는 앞쪽, 깎아지른 듯한 석산 위에 있으며, 해발 800m의 성 정상에는 80칸에 이르는 반석과, 실료대·방령대 등이 있다. 신라 때 권 ·김 두 장군이 난을 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말 이전부터 존속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울산바위
권금성에 올라서 보면 멀리 1275봉우리의 공룡능선과 만물상(바로 뒤의 거대한 바위), 나한봉, 마등령, 세존봉, 장군봉, 적벽, 저항령, 황철봉이 굽이굽이 보이고, 저 건너편에 울산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신흥사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라고 불렀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 수 천 칸의 대사찰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 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 후 의상이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라고 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연옥·혜원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신흥사 대웅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호
신흥사는 1912년부터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197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종무를 관장(말사 25개 사찰·암자) 본사로 승격되었으며 설악산 외설악의 주찰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이 절이 가지고 있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시루와 범종, 경판 227장, 사천왕상 등이 있다. 설악동 일대가 모두 신흥사의 소유일 만큼 부자 사찰이기도 하다.
신흥사 입구의 전나무
이곳에서
강원도 동해안 역사기행을 마무리 하였다.
역사기행을 마치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숫자 팔자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 전국 방방곡곡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팔경으로 꼽아 즐겼다. 팔방미인하면 다방면에 소질 있는 사람을 뜻하듯이 팔경이라 함은 그 지역 자연경관의 정수를 말한다.
경치가 좋은 곳이면 으레 누각과 정자를 세워 자연과 하나 됨을 기뻐하고 그 감흥을 시와 노래, 그림으로 남겼는데… 관동팔경은 정철의 ‘관동별곡’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치이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선조들의 고운 심성이 녹아있는 관동팔경.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그곳을 찾아 다녀왔다. 사람들은 삶에 부대끼는 것이 힘들어 여행을 하지만, 나는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자연 속에서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리워 길을 떠난다.
강원도, 특히 동해안을 여행하는 내내 해오름의 바다에서 우리 아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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