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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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한숨과 시와 노래 전라도 역사기행 조회수 : 1373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10-05-31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전라도 역사기행


여름
역사기행은
전라남, 북도
지역을 둘러보는
남도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전라도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향토의 서정이
흠뻑 묻어나는 곳입니다.

처음으로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이 실렸네요. 이 사진은 여행에 동행한 박준근전도사가 찍은 것입니다.



남도석성
사적 제 127호

고려 원종 때 배중손이 진도에 와서 몽골에 항쟁할 때(1270∼1273년) 근거지로 삼았던 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생각되는데, 그 까닭은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1월이기 때문이다.



남도석성

진도의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을 위도와 가리포에 두었는데, 이후 남도진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경에는 석축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성가퀴 또는 여장)이 43개소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동문·서문·남문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쌍운교

남도석성은 남문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에는 2개의 무지개다리가 있다. 단운교와 쌍운교이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이 다리는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운림산방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유가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을 운림각이라 하였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었다.



운림산방의 안채

안채는 一자형의 초가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윗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운림산방

사진은 운림산방의 안채로 들어가는 문으로 들어다본 정원의 모습인데, 넝쿨장미 위쪽으로 운림산방의 처마가 보인다.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산방의 앞 마당에 자리잡은 연못과 늘어진 배롱나무가 아름답다.



전왕온의 묘
전남기념물 제126호

고려시대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왕온의 무덤이다. 이 골짜기는 고려 중기 삼별초군이 용장산성으로부터 쫓겨 와서 격전을 벌인 곳인데, 당시 이곳이 삼별초의 피로 물들었다 하여 ‘피내’ 또는 ‘혈천’이라 불렀으며, 여몽연합군의 지휘자인 홍다구가 싸운 곳이란 뜻으로 다근투골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왕온은 아들 왕항과 함께 적장의 손에 죽었다.



진돗개
천연기념물 제53호

한국고유의 특산종인 진돗개의 키는 수컷이 50∼55㎝이고 암컷은 45∼50㎝이며, 털 빛깔은 황색(황구)과 백색(백구)의 2종류가 있고, 얼굴은 정면에서 보면 거의 팔각형이며, 목은 굵어서 힘이 있고 다부지게 보인다. 네 다리는 강건하고 앞다리는 곧지만 뒷다리는 뒤쪽으로 뻗친다. 등 면은 곧고 꼬리에는 털이 많으며, 힘이 있고 생후 3개월이면 꼬리를 감기 시작한다.



용장산성
사적 제 126호

삼별초를 이끌던 고려의 장군 배중손이 쌓은 산성이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군은 1270년 8월 19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하여 선황봉 둘레에 산성을 축성하고 대몽항전을 위해 전열을 정비하였다. 초기에는 전라도 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제2단계로는 후방의 배후지가 되는 제주도의 확보하였고, 3단계는 경상도 해안까지 지배권의 확대하였다. 이로써 개경의 고려정부에 큰 타격을 입혔다.



배중손장군 사당

배중손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강화에서 이곳에 들어와, 관부·영성을 쌓고, 왕을 옹립하여, 고려와 원나라(몽고)에 저항하였으나, 김방경이 이끈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후 제주로 옮긴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에 맞섰으나, 원종 14년(1273) 4월 무너지고 말았다.



벽파진

벽파진은 진도 동부 해안가에 있던 나루터로 진도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본래 국방상 중요지역의 하나였던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강화를 출발한 삼별초가 상륙한 곳이며, 임진왜란(1592)·정유재란(1597) 때에는 수군영을 두었는데, 이순신의 전첩비(위의 사진)가 있다.



명량해협과 진도대교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해협이며,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가장 좁은 부분의 너비는 293 m. 조수의 시속은 평균 16마일(시속 25.7km)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이용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는데, 명량대첩이다. 해협 위로는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있다. 진도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이다.



땅끝

북위 34°17'38"에 위치하는 ‘땅 끝’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한반도의 최남단 마을로 토말 또는 갈두마을이라고도 한다.

해남읍 남쪽 43.5km 지점인 이곳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북위 43°0'39")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으로 이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룬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해남의 땅 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극북의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이로부터 ‘3,000리 강산’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청해진

통일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일본과 무역하던 곳이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의 쉬저우에 건너가 무령군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가 된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분개,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청해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쾌히 승락하였고, 장보고는 이곳에 청해진을 세웠다(828년).



장보고가 설치한 나무말뚝

해적선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다에 박아 놓은 목책(나무말뚝)이다.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녹우당
사적 제 167호

고산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진 해남 윤씨의 종택 녹우당을 윤선도의 생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윤선도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명동에서 자라다가 8세의 나이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고택의 대문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인데, 정면을 향하지 않고 옆으로 나 있다.

사랑채(녹우당)는 윤선도가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을 1669년에 해남까지 옮겨온 것이다.



윤선도의 사당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를 일컫는 데, 해남 윤씨는 연안 이씨, 여흥 민씨와 더불어서 해남 땅의 큰 성씨로서 명문가에 속한다.

조선중기의 시조 작가인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면서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이 집안사람이며, 다산 정양용은 윤두서의 손녀 딸이 낳은 아들이다.



비자나무숲
천연기념물 241호

500년가량 된 비자나무 숲인데,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가난해 진다는 시조의 유언에 따라 후손들이 이 숲을 잘 보존해왔다고 한다. 이 숲에서 녹우당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초록비가 내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다산초당
사적 제 107호

다산은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에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 밖의 주막집에서 살았는데,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다산은 백련사에 들렀다가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 때 다도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다.



영랑생가
중요민속자료 제252호

영랑 김윤식은 한국 현대문학 초창기의 시인이다. 휘문의숙과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서 공부한 그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여 우리나라의 순수시,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해 있다가 9.28수복 때 파편에 맞고, 이튼 날 47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진은 생가의 돌담인데, 그의 시가 가득 담겨있는 듯하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국립 5.18 민주묘지

5·18묘역이라고도 하며,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34번지 일원에 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평가작업 및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성지로 가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광주광역시가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성한 국립묘지이다.



.18 민주묘지

묘역 안에는 5·18 영령의 묘 340여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당시의 사망자뿐 아니라 부상자 중에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행방불명되었다가 찾은 분들이 함께 묻혀 있다.



소쇄원
명승 제 40호
사적 제 304호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이다. 양산보는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소쇄원의 매대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화단인 매대인데, 제월당과 더불어 달맞이를 하던 곳이다. 비탈의 침식을 막기 위하여 화계(꽃 계단)를 만들고 매화를 심은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이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박혀 있다.



가사문학관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사림들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 하며 낙향하여, 무등산 정기 어린 이곳 담양 일원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 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는데, 이곳에서 가사문학이 발전하였다.



환벽당
광주기념물 제1호.
정송강 유적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인데, 이곳에서 정철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식영정
전남기념물 제1호.
정송강 유적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옥헌
명승 제58호

조선 중기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이다. 소쇄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명옥헌 산책

명옥헌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수 백 년 된 배롱나무가 가득하며,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의 터가 남아 있다.

배롱나무는 꽃을 피우는 기간이 긴 만큼 이름도 다양한데,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하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송강정
전남기념물 제1호.
정송강 유적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1584년(선조 17)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대사헌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조용히 은거생활을 했는데, 이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를 지었다.



면앙정
전남기념물 제6호

1533년(중종 28) 송순이 건립하였는데,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다.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 백 년을 살고자 한다>는 곳이다.



대나무박물관

예로부터 대나무고을(죽향)로 널리 알려진 담양군이 1966년 죽세공예품의 보존·전시, 기술정보의 교환, 판매 알선을 위해 '죽세공예센터'라는 이름으로 담양군 담양읍 담주리에 설립하였다. 1981년 죽물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8년 담양읍 천변리에 조성된 대나무 관련 종합관광단지 내로 이전하였으며, 2003년 3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죽녹원

죽녹원은 2003년에 조성한 약 16만㎢의 울창한 대나무 숲이다. 이 숲에는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전망대에 오르면 담양천을 비롯하여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로 조성된 담양 관방제림과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관방제림
천연기념물 제366호

관방제(둑)는 천변리까지를 말하며 길이는 약 2km이다. 200~300여 년생의 나무가 서 있는데, 큰 나무는 가슴높이 줄기 지름이 130cm이나 된다.

이 숲은 1648년 부사 성이성이 제방을 수축했고, 1854년(철종 5) 부사 황종림이 관비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하여 만들었기에 관방제라 이름 하였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메타세콰이아(Metasequoia)는 1억 년 전 백악기 공룡시대 화석에서도 발견되는 '살아있는 화석나무'라고 불리는 측백나무과의 나무인데, 메타세쿼이아속 중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종이다.

수삼나무, 메타세쿼이아라고도 부른다. 중국 쓰촨 성, 허베이 성이 원산지로, 성장이 빨라 가로수로 널리 심는다. 하지만 야생에 존재하고 있는 개체는 5,000그루에 불과하며, 이에 따라 특별 보호되고 있다.



고창 고인돌유적공원
사적 제 391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창 고인돌 유적공원은 강화와 화순의 고인돌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지역의 지석묘 군을 보존·관리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유적공원이다. 고창 지석묘군은 국내 최대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으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대의 매산 마을을 중심으로 고인돌 총 447기가 분포되어 있다.



고창 고인돌유적 공원

고인돌은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 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에도 분포하고 있지만,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인돌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고창읍성
사적 제 145호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린데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1453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고창읍성의 옥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고창읍성의 동헌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군·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은 외동헌과 내동헌(서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사진)라고 불렀다.



맹종죽

1930년대 한 스님이 심었다는 빽빽한 맹종죽숲이 볼 만하다. 맹종죽은 강남죽(江南竹)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산이며 한국에서는 남부지방에서 재배한다. 높이 10∼20m, 지름 20cm에 달한다.



동학형명 모의탑

정읍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언덕에 세워진 기념탑으로 갑오농민전쟁을 모의하던 장소에 세운 기념탑이다.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건립한 혁명 모의탑이다.



사발통문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 주위에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만일의 경우 그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할 수 있는 알림문서이다.



고부관아터

옛날 고부는 전주부(오늘날 전주) 다음 가는 군이었다. 전주부윤이 종2품이고 현령, 현감이 종5,6품인데 고부군수만은 종4품이었기 때문이다. 수탈의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현재의 고부초등학교, 그 어디쯤이었을 고부관아는 주춧돌과 기와조각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황토현 전적지
사적 제295호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이다.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요지였다. 1894년 봄 고부군수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자 수천명의 관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농문군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4월 6일 밤 농민군이 관군을 기습공격을 하였으며, 이때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고, 농민군은 이를 계기로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



동학형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탑으로 1963년 10월 3일에 건립하였다.



전봉준 옛집
사적 제 293호

전봉준 장군이 고부 봉기를 할 때까지 5~6년 간 마을 훈장 노릇을 하며 기거하였던 집으로 혁명이후 불태워 진 것을 다시 보수하여 본채와 아래 채, 그리고 마당가의 변소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전봉준 장군의 생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4세까지는 정읍에서 살다가, 그 후 훈장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살던 곳이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다.



말목장터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된 곳

이곳은 부안과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1894년 고부 농민봉기의 불이 번진 곳이다. 이미 농민군 지도자들이 모의를 끝내고,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손에 괭이와 죽창을 들고 이곳에 모여 고부관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날의 일을 기념할 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으며, 옛 장터의 한 귀퉁이에는 감나무만이 가지를 흔들고 서 있을 뿐있다.



만석보터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만석보가 있던 곳인데, 고부 군수 조병갑은 이곳에 보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물세를 받았다.

지금은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만석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멀쩡한 보가 있었음에도 새로이 보를 쌓고, 그 세금을 거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의 상징이었던 탓에 분노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부수어 버려 지금은 비석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치며

굽이굽이 삼/백/리/
아름다운 남도 길을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향토의 서정이 흠씬 묻어나는 곳입니다.
가는 곳마다
정겨운 어머니 품속 같은 길을
굽이돌아
남도의 정취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길목마다 치열한 삶의 냄새,
고통스런 아픔의 역사와
마주서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눈물겨운 남도의 역사를 만나고,
때로는 꿈에 본 듯 아름다운
남도의 자연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남도기행에 참가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역사의 오솔길을 걸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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