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시간이 멈춘 땅 경상북도 역사기행 | 조회수 : 128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8-10-21 |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운강고택의 소슬대문
중요민속자료 제109호
예로부터 밀양 박씨들이 세거해 온 곳이다. 선조 때 박숙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초가이던 집이 점차 기와로 바뀌었고, 점차 규모가 커졌다. 운강 박시묵 현재의 집을 지었기 때문에 운강고택이라 한다. 1829년의 일이다. 6.25전쟁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 집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운강고택
주택전체의 배열은 평평한 대지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튼튼한 ㅁ자형 건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뒤로 안채를 중심으로 한 ㅁ자형 건물이 이어지고 있다.
운강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 섶말에는 운강고택을 비롯하여 도이고택, 명중고택, 운남고택 등의 옛집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가 밀양 박씨들의 살림집이다.
운강고택 사랑채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홀 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점잖고 단아한 집이다. 사랑채 옆으로는 내외문이 있는데 여인들이 사랑채를 피하여 안채로 드나들던 문이다.
사랑채와 중 문간채 사이에는 기와 조각을 이용하여 吉자와 간단한 꽃무늬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는 귀갑문 비슷한 기하학적 무늬를 장식한 꽃담이 있다.
만화정
만화정은 운강이 지었다는 별서로 금천의 벼랑위에 세워져 있다. 누마루에 오르면 주변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현판이 20개도 넘게 걸려 있어 그 경치가 뛰어남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강이 마르고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아서 그 경치가 변해버리고 말았다.
집 앞에는 300년 쯤 자란 물버들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바람에 일렁이는 물버들의 가늘고 긴 가지 사이로 바라보는 만화정은 뒤편 언덕의 소나무 숲과 더불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장연사터 3층석탑
보물 제677호
청도는 마을마다 감이 익는 고장이다. 청도감은 크고 맛이 좋지만 씨가 없어서 ‘청도반시’라 하여 예로부터 궁중에 진상하던 이 고을의 특산물이다.
낙동강 지류로 흐르는 냇가의 낮은 구릉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동·서로 두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특별한 것이 없이 평범한데, 주변의 감나무와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장연사터 당간지주
한 때는 이곳에서 찬란하게 빛났을 장연사는 세월 속에 묻혀서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몇 개의 석물만 남아 있다.
삼층 쌍탑 앞 개울 건너 감나무 밭에는 부러진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이 있고, 부러진 윗 부분은 장수마을로 들어가면서 첫 번째 만나는 집의 사원재(문중의 재실)의 뜰 앞에 놓여있다. 이 당간지주는 다른 당간지주와 다르게 조선시대의 목가구에서나 볼 수 있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진의 당간지주 가운데로 장연사 3층 석탑이 보인다.
청도 석빙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07호
석빙고는 겨울철에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겨울에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얼음 창고이다. 겨울철에 얼음을 갈무리하던 관행은 신라 지증왕(500~5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목(木)빙고에 얼음을 보관하였으나 세종 때부터 석빙고로 바뀌었다.
청도 석빙고는 남한에 남아 있는 6개의 석빙고(청도, 현풍, 안동, 경주, 창녕, 영산) 중에 축조연대가 가장 빠른데, 봉토가 모두 유실되고 홍예보 사이를 덮고 있던 판석들도 모두 없어져, 네 줄의 홍예보만이 초승달처럼 남아 있다
창녕 교동고분군
사적 제80호
개항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중에는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고분들을 보면서 ‘무덤의 나라’라고 놀라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를 조금 유서 깊은 고을치고 삼국시대를 넘어서는 고분이 없는 마을이 없다.
청도에서 창녕으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는 소담스러운 가야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가야시대의 사람들은 산 정상에 묘를 썼는데, 사후에 더 좋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교동고분군
가야는 자국의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도 가야국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이후 부산 김해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가야국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창녕의 교동지역의 발굴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가야의 실체를 알려주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어 가야가 삼국에 뒤지지 않은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창녕 척경비
국보 제33호
빛벌가야(비화가야)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길목이었는데, 신라는 금관가야 다음으로 빛벌가야를 점령(진흥왕 16년)한 후 이곳에 척경비를 세우고 서진의 거점으로 삼았다.
대원군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218호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물리친 후 백성들에게 쇄국의 의지를 고취하고자 세운 비이다. 다른 비석과는 달리 귀부와 이수가 없고, 일반 척화비와 마찬가지로 통비 형태이다.
원문은 洋夷 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이라고 하였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戒我萬年子孫(계아만년자손) 丙寅作辛未立(병인작신미립)이라고 씌어 있는데,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즉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자는 것이므로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웠다는 뜻이다. 대원군은 이러한 척화비를 전국 각처에 세웠다.
창녕 퇴천 3층석탑
경남유형문화제 제10호
이 삼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워 만든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이다. 그러나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고, 상층기단 갑석도 일부가 부서졌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귀기둥)와 탱주(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기둥모양으로 돋을새김을 한 것)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창녕객사
경남유형문화제 제231호
창건연대와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주사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창녕현을 방문하는 관원과 손님들의 접대장소로 사용하던 관아 부속건물이다.
창녕 석빙고
보물 제310호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창녕석빙고는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 옆에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낙동강과 도동서원
사적 제488호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원래는 1568년 지방유림에서 현풍현의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에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하였다. 1604년에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듬해 강당을 지어 서원을 완공하였다. 이때 서원의 건립을 조도한 인물이 한훤당의 외손자인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자부심 넘치는 의가가 담긴 이름이다.
도동서원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며,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집을 짓기 위하여 4단의 석축을 가지런히 쌓았는데, 도동서원에는 이런 석축이 유난히 많아 사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18단의 석단이 있다.
도동서원 중정당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을 가진 강학공간(공부하는 곳)인 중정당의 기단은 돌을 각각 다른 크기로 다듬어 조각보처럼 맞추었다. 그리고 기둥에는 오현(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굉필) 중에 한훤당이 으뜸이라는 상징으로 하얀 문종이가 둘러져 있다.
환주문과 담장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답다. 맞담이란, 돌멩이를 마주 놓아 겹으로 쌓은 돌담을 말한다. 이 담장과 중정당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굉필나무
서원 앞의 은행나무는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1607년에 한강 정구선생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400년 된 은행나무이다.
태고정
보물 제554호
태고정은 박팽년의 유복손인 박일산이 세운 아흔 아홉 칸의 종택에 딸린 부속 건물로 1479년에 세워졌다. 이 정자는 지붕처리에 있어서 매우 특색이 있다. 대청이 있는 오른쪽은 팔작지붕, 방과 부엌이 있는 왼쪽은 맞배지붕인데, 여기에 부섭지붕을 달아 마감하였다.
육신사
햇육신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육신사
이 일대의 묘골은 박팽년의 후손이 자리 잡고 살던 고을인데, 하루는 박팽년의 현손인 계창공이 제를 지내고 잠을 자는데, 함께 죽음을 당한 다섯 분이 배를 굶주린 채 사당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 육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삼가헌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박팽년의 11대손 삼가헌 박성수(이조참판)가 1747년에 초가를 짓고 삼가헌이라고 하였다. 살림채 영역과 별당채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별당채 영역을 하엽정이라고 한다. 작은 사랑으로 통하는 벽 위에 <예의염치효제충신>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써 있는데, 이수 허목의 글씨이다. 이 집에서 중문채는 초가인데, 사대부 집안에서 청빈함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건축방식을 택하곤 하였다.
하엽정
가산산성
사적 제216호
우리나라는 고대국가 형성기 이전, 성이 국경의 구실을 하던 때부터 많은 성을 쌓았다. 전란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그 만큼 성도 많이 쌓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축성술과 그 형태도 그 이후 큰 변화가 없을 정도로 발달하였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꾸준히 만들어지고 고쳐지던 성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가산산성은 해발 910m의 가산에 쌓은 성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새로 만들어졌다. 골짜기와 능선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태뫼식과 포곡식이 혼합된 산성으로 내성과 중성 외성을 갖추고 있다.
가산산성
인조 17년에 경상도관찰사 이명웅에 의해서 시작된 축성공사에는 1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공사비가 동원되어 내성을 쌓았는데, 혹독한 공사로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자 이명웅은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숙종 때 관찰사 이세재에 의해서 외성이 축조되었는데, 이때 성안에 천주사라는 절을 짓고 승려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중성은 영조 1년에 관찰사 정익하가 쌓았으며, 주로 군량미를 비축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중성에는 빙고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6.25 때도 북한군 제 14연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아군이 큰 승리를 거둔 기록이 남아 있는 산성이다.
송림사
비교적 평탄하고 널찍한 터에 자리 잡은 송림사는 그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사찰인데, 신라 진흥왕 5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544년(진흥왕 5)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이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 후 1092년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여 번성하였지만,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복구했지만 임진왜란 때 또 다시 소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58년에 중창된 것이다.
송림사라 이름한 것을 보면 소나무가 많은 법도 한데, 그럴듯한 소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송림사 전탑
보물 제189호
대웅전 앞에는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벽돌탑인 송림사 오층전탑이 자리 잡고 있다. 전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건축 재료로 벽돌을 즐겨 사용하는 중국 사람들에 의해서 크게 유행한 탑의 형식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유행하지는 못했다. 현존하는 1,500기 이상의 탑이 모두 석탑이고, 전탑은 오직 5기만이 전해진다.
송림사 대웅전
대웅전 전면 기둥의 칸과 칸 사이가 3:2:1의 비율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고, 문짝 12개의 문빗살의 변화도 다양해서 다채로우면서도 점잖은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다부전적기념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에 형성된 여러 곳의 전장(전투가 일어난 장소) 중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장이 다부동이다.
다부전적기념관
이곳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이 1950년 8월부터 한 달이 넘도록 피로 얼룩진 전투를 하였고,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되새기기 위해서 1981년에 건립되었다. 이 전쟁에서 유엔군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남의 땅에 와서 희생이 피를 흘린 것이다. 우리도 Not for self의 삶을 살자.
부용대
해발 64m의 부용대에 오르면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겸암정사
하회에서 강 건너 있는 부용대의 오른 쪽 절벽위에 자리 잡은 정자이다. 겸암 류운룡이 26세 때 짓고 머물면서 자신을 수양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현판 중 앞의 것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높은 절벽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자연이 어울린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精舍다운 지형 요건과 전통이 배어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겸암이란, 군자는 스스로를 낮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선생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정자이다. 옥연은 정사의 앞을 흐르는 강의 깊은 곳이 깊고 맑아서 서애선생이 옥연정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을 잃자,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서애 선생이 가난하여 어려움을 당하자 탄홍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시주하여 재력을 부담하므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은 내려다보면 낙동강 물줄기가 마을의 앞에 이르러 태극을 그리면서 휘감아 나간다. 이렇게 물이 돌아 나간다고 해서 한자로 하회(河回)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은 정겹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믄 초가집들이 기와집과 어울려 있는데, 주로 종갓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이다.
충효당
서예 류성룡의 종가로 남촌을 대표한다. 서애 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가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보물 제 414호로 지정되었다.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84호
양진당과 더불어서 북촌을 대표하는 북촌댁은 모두 54칸으로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살림집이다. 솟을 대문이 매우 크고 지붕도 높아서 쉽게 눈에 띤다. 사진은 북촌댁의 솟을대문의 모습이다.
북촌댁은 세 개의 사랑채를 가지고 있는데, 큰 사랑인 <북촌유거>는 가장 윗어른인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던 사랑으로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중간사랑인 <화경당>은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사랑이며, 당호는 가족과 친족 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며 충효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작은사랑인 <수신와>는 손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어렵게 사는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낮추어 살라는 뜻으로 어른의 가르침이담겨있는 당호이다.
하회마을의 골목길과 황토담장
하회마을의 길들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삼신당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어 있는데 거의 흙 담이다. 이는 하회마을이 배 모양이라 돌담을 쌓으면 가라앉는 다하여 흙 담을 쌓았으며, 우물도 파지 않고 물을 동네 밖에서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만송정
소나무가 만여 그루나 우거져 있어서 만송정이라고 하는 이곳은 겸암 유운룡 선생이 조성한 풍치림이다. 기록상으로는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유씨의 사학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서원 입교당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을 가진 강당으로 서원의 핵심건물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
만대루의 만대는 두보의 시 翠屛宣晩對(취병선만대/푸른 절벽은 느지막이 마주함이 좋다)에서 따온 말인데, 푸른 절벽에 취해서 자리를 뜨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한 누마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병산이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입교당에서 본 만대루와 병산의 모습이 아름답다. 양쪽의 건물은 동재와 서재이다.
삼구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
삼구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영전이 건립한 정자이다. 김영전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사람인데, 그가 이 정자를 지은 것은 88세 되는 노모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삼구정이란 이름은 십장생인 거북과 같이 생긴 3개의 바위가 정자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으로 정자 뜰에 소반처럼 벌려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3마리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안이씨 종택
보물 제553호
이 건물은 이홍인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 조선시대인 1551년(명종 6) 무렵에 지었으며 '충효당'이라고 부른다. 이홍인은 무예와 병법에 능숙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풍천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이에 나라로부터 정충각을 정려 받았다. 또 그 9세손 이한오의 뛰어난 효행을 기려 정효각을 정려 받았다. 이로써 이 집에서 충신과 효자가 났다고 해서 충효당이라 불리게 됐다.
봉정사 가는 길
봉정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2년에 창건된 사찰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창건설화가 재미있는데, 영주의 부석사에서 의상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봉황이 앉은 곳이 이곳이어서 여기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고 했다고 한다. 봉정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상량을 할 때 축복하는 글)에 의하면 이 절은 의상의 제자인 능인스님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55호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15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72년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할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363년 지붕을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보다 약 150~200년을 앞서서 건축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이다.
명옥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4호
이황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1665년 사림에서 건립한 정자로 태장리 봉정사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의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중국 서진의 시인 육기가 쓴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시구에서 글귀를 따 명옥대(鳴玉臺)로 개칭했다고 한다.
원주변씨 간재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1호
원주 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은 임진왜란 시 의병장인 간재 변중일의 종택으로 작은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사당·정자가 아래서부터 위로 자연 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하여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간재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국난극복에 앞장섰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숙종 12년에 정충효각을 하사받았다.
신세동 7층전탑
국보 제16호
전체높이가 17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으로 후대에 크게 훼손된 모습이 안타깝다.
조선 성종 때는 불교를 중요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륜부의 금속장식을 녹여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바로 옆으로 철로를 놓으면서 그 진동 때문에 탑을 수리하면서 시멘트를 덧칠해 놓았다.
임청각
중요민속자료 제185호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이 안동으로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은 후 중종 14년(1519년) 형조좌랑을 지냈던 이명이 지은 집으로 아흔아홉 칸 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70여 칸만 남았다.
임청각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집이다. 독립운동으로 온 집안이 풍비박살이 난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옛집이다.
퇴계 태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굶어 쓰러진 스님을 구해주었는데, 그 스님이 터를 잡아 주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히 된다”고 하여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계양의 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이식의 일곱째 아들로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안채 가운데서 불쑥 튀어 나온 방이 퇴계가 탱난 태실이다.
퇴계종택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도산면 일대는 퇴계를 배출한 진성 이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진성 이씨는 조선시대의 명문 사대부인데, 퇴계를 중심으로 과거급제가가 58명, 문집을 남긴 학자가 50명이나 되는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긴다. 이 종택은 퇴계선생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퇴계종택
도산면 토계리의 퇴계 종택은 일본군에 의해 2번이나 불 탄 것을 1929년에 새로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새로 지은 것이다. 1896년 의병 진압부대가 지른 불로 1,400여권의 책이 불타 없어졌으며, 그 후 1907년에는 의병활동을 지원했다가 온혜의 노송정(퇴계가 태어난 곳)과 함께 또 다시 일본군이 불을 놓아 화재의 참변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복원된 종택은 전형적인 경북지방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신당(민간신앙)
퇴계종택에서 육사생가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삼신당이다.
육사(이활) 기념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
육사(陸史) 이활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도산에서 태어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한 독립투사이며 시인이다.
그는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 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는데, 육사는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일한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도산서원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은 영남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퇴계는 본래 도산의 남쪽에 사당을 짓고 자리 잡아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5년간의 공사 끝에 1561년,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도산서원 시사단
1792년 정조는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과거를 치르게 했는데, 응시자가 너무 많아 서원에서는 볼 수 없어 과장을 강변으로 옮기고 시험문제를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보았다고 한다. 답안지 제출자만도 3632명이었는데, 이를 봉해서 서울로 가져와 채점하여 7명을 뽑아 시상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웠다.
열정
도산서원에서 쓰던 우물인데, 도산 서당시절부터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아서 선비들의 세심장(마음을 씻는 곳)과도 같다.
도산서당
퇴계가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평범한 3칸 집이다.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현판은 누가 언제 썼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서당과 잘 어울린다. 퇴계가 3년에 걸쳐 지은 사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마루를 달아내었다.
절우사
퇴계는 평소에 솔, 대, 매화, 국화, 연을 벗으로 삼아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이 모인 육우원을 꿈꾸었다. 절우사는 퇴계가 61세 되던 해에 서당의 마당에 만든 화계인데, 이들과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를 이루었다. 서당의 마당에는 정우당 연못이 있는데, 깨끗함을 벗한다는 뜻이다.
농운정사
일반 건축에서는 꺼리는 工자형의 대칭적인 건축물로 도산서당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것은 工夫에 전념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좌우 대칭적인 건물에 비하여 창과 문은 굳이 대칭이 아니어서 자유로워 보인다.
동서 광명실
이곳에는 907종의 4,338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는데,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왕이 내려준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은 이처럼 유생들을 가르치는 기능 외에 도서관의 역할도 했으며, 보관하는 책을 바탕으로 책을 역어내는 출판사의 구실도 했다.
도산서원 전교당
보물 210호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르게 매우 소박한 건물이지만 넓은 기단위에 앉아 위엄이 있다. 마루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며, 온돌방은 훈도(사감선생님)의 방이다.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은 선조의 명을 받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유교박물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중심인 안동에 세워진 유교문화박물관은 유교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인 유교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산림과학박물관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은 잊혀져가는 산림자료의 영구적 보존과 학술연구, 우리나라국토의 75%에 달하는 산림자원의 보존, 그리고 건강한 산림문화를 만들기 위하여 세워진 박물관이다.
닭실마을 청암정
사적 및 명승 제3호
청암정은 연못 가운데 있는 커다랗고 널찍한 바위위에 올려 지은 건물로 거의가 누마루로 개방되어 있다. 정자에 오르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청암정에 오르면 조선 중후기의 명필들의 글씨로 새긴 현판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 靑巖水石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이 88세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절필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애용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조사당 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 국보 제46호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7호
삼층석탑 보물 제249호
북지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20호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소백산맥의 모습이 장쾌하다. 이처럼 소백산맥의 수많은 봉오리들을 절 마당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 봉황산 중턱까지 수많은 계단과 석축을 쌓아 절을 지은 의상대사의 안목이 놀랍다.
부석사의 아홉단 석축
부석사를 통해서 삼국을 아우르려는 의상의 의도는 부석사의 가람 배치와 부석사를 대표하는 아홉 단계의 석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부석사의 가람배치와 길은 華(빛날 화)의 형태를 띠고 있고, 석축의 돌멩이 하나하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인의 화합을 의미하고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
4.28m 높이로 그 자태가 늘씬하고 수려한 당간지주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안정감도 느껴진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긴장미가 아름답다. 옛날에는 두 기둥 사이에 버텨선 당간에서 깃발이 펄럭였을 것이다.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석사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영역을 이룬다.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아래서 보면 대석단과 함께 어울려 위세가 있다.
부석사 대웅전
무량수전은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로서 건축사적인 의미나 건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358년에 왜구의 침노로 불탄 것을 1376년에 중수하였으니, 봉정사의 극락전(1363년)과 나이를 다툴 만하다. 현판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머물 때 쓴 것이라고 한다.
부석사에 오르는 은행나무 숲길
부석사에 오르는 길은 은행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품어 안는다. 나무 사이로 햇살은 천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사이로 뛰는 동심이 행복하고 아름답다. 힘든 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안향의 영정 국보 제111호
주세붕 영정 보물 제717호
숙수사터 당간지주 보물 제59호
꼬불꼬불 죽령을 넘어 닿는 첫 마을이 풍기인데, 여기에 소수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국왕으로부터 편액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을 말한다.
소수서원 명륜당
서원의 중심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으로 서원의 중심건물이다. 백운동이란 현판이 달려있는 이 강학당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대청에는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명종의 친필이다.
소수서원의 학자수림
300년이 넘은 적송(붉은 소나무)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 부르는 까닭은 소나무가 춥고 매운 겨울을 이겨내는 것처럼 어려운 학문의 과정을 견뎌내고 뜻을 이루라는 의미이다. 유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휴식이 필요하면 이 숲을 거닐며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경렴정
소수서원의 담장 죽계 가에 있는 정자인데, 1543년에 주세붕이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이다.
취한대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서원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퇴계는 죽계천 강에 정자를 짓고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면서 휴식하도록 했다.
경(敬)자 바위
주세붕이 새긴 글씨이다. 성리학에서는 물의 시작과 끝을 경(敬)으로 보았다. 內明者敬(내명자경) 外明者義(외명자의)라 하였는데 이 말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일을 처단하는 것은 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경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의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경(敬)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며, 선비들의 지침이다.
숙수사터 당간지주
보물 제59호
서원에 들어가는 입구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서원에 왠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이 자리 잡은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국가의 통치원리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자 절은 자라지고 그 자리에 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여행은 단풍이 절정이었다.
가는 곳마다 산과 들은 불 타 올랐다.
그래서
가을 여행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도산서원에 들어가는
가지런한 길목에
단풍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어도
저마다의 삶이 있어
가랑잎들의 표정이 모두 다르다.
각양각색의 마음을 가진
아이들을 고스란히 닮았다.
우리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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