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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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길따라 물따라 남해안 역사기행 조회수 : 840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8-05-06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경상남도 합천의 가야산 자락에 터를 잡고 있는 법보사찰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8년인 802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순응대사와 이정대사에 의해서 창건되었으며, 그 후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비에 의해서 중창 불사된 사찰이다. 해인사라는 명칭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따온 이름으로 화엄 10찰 가운데 하나이다.

해인(海印)이라는 말의 뜻은 바다에 온갖 사물이 그림자처럼 비취듯이 부처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바다에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해인사 3층석탑

탑은 원래 부처의 몸으로 불자들에게는 예배의 대상이다. 신라시대의 원형으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다라전 입구의 월문

팔만 대장경은 수다라장(경전이라는 의미의 범어 수트라를 의역한 것)과 법보전에 보관되어 있는데, 수다라장은 들어가는 입구가 종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모양은 가늠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팔만대장경판
국보 제32호/세계기록문화유산

대장경은 불교교리를 종합한 교리서인데, 강화도로 피난 가 있는 어려운 시기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84,000개의 법문. 5,200만자 중에 빠진 것이나 틀린 글자가 하나도 없다. 글자체가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반듯하다. 뿐만 아니라 목판(산벗나무, 돌배나무)이 주재료임에도 불구하고, 700년 이상 온전히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팔만대장경 판전
국보 제52호/세계문화유산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대부분의 사찰에서 본전을 맨 위에 두는 것이 원칙인데, 해인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대장경이 얼마나 중요성을 지닌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대장경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경판전은 700년이 넘게 목조대장경을 보존한 신비의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 판전의 과학

이 건물들은 경판을 보호하고 보관하도록 설계되었다.

1. 건물의 외벽에 크기가 다른 창을 설치하여 공기가 잘 순환되도록 하였다. 위의 창을 통해서 외부의 공기가 들어오고, 아래로 빠져 나간다. 그래서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도록 했다.

2. 건물의 앞면은 아래창이 위창보다 4배 가량 크고, 건물의 뒷면에는 위창이 아래 창보다 1.5배정도 크게 설계되었는데, 이는 건물 뒤쪽에서 내려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공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3. 건물바닥에는 숯, 흙가루, 모래와 소금을 섞어서 마무리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건물 내부의 습도와 온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하여 대장경을 보호하고 있다.

4. 바닥을 흙으로 마무리하고, 천장에도 지붕이 보이는 형식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습기가 바닥과 천장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동서 사간고(고려각판전)
국보 제206호

동서 사간고는 장경판전의 북쪽 건물인 법보전과 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이다. 이곳에는 국보 206호인 고려 각판(사간판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는 9종의 분사대장도감의 판각판과 조선조에 판각된 사간판(寺刊板)이 포함되어 있다. 위의 사진은 수다라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월문(둥근 모양을 한 문)인데, 그 모양이 아름답다.



순천 낙안읍성

조선 태조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4년(1626) 임경업 장군이 33세 때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다른 지역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지대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총 길이 1,410m의 성곽을 쌓았는데, 400년이 지난 지금도 끊긴 데가 없이 웅장하다.



읍성길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읍성의 동헌

옛날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제주의 민속마을이나 용인의 민속촌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이 절로 든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특히 6.25사변 이후 많은 훼손을 가져왔으나, 성안에는 1450년 처음 건립되었다는 낙안 객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동헌은 복원되었다. 읍성은 주로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기 마련이므로 성안에 민가와 관아가 공존한다.



읍성의 서헌

서헌은 관아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내아라고도 하는데, 지방관이 머무는 살림집이다.



낙안읍성의 우물

낙안읍성의 중앙에 있는 우물이다.



순천 신성리왜성

순천을 지나 여수로 가는 길 왼편으로 해룡리 신성리가 있다. 2백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신성리 오른편으로 임진란 당시 왜장이던 소서행장(고니시 유끼나카)이 쌓은 왜성이 있다. 이 왜성은 소서행장이 호남공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지은 것으로 성의 형태가 잘 보존돼 있다. 침략자의 손에 의해 지어진 성을 둘러본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또 신성리 반대편에는 충무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마주보는 신성리 왜성과 충무사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왜성의 호구

순천왜성은 외성은 토성으로 쌓고, 내성은 석성을 쌓았다. 석성의 문을 호구라고 하는데, 문에 들어섰을 때 일단 막혀 있고, 꺾인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보이는 우리나라의 성과는 구조가 다르다. 왜성의 성문은 12개였으나 지금은 5군데가 남아 있는데, 엄청난 규모를 가진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왜성 앞 바다

해안가도 통나무로 목책을 설치하여 이순신의 함대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순신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남해대교와 노량해협

1598년 8월에 히데요시가 죽자 상황의 급변하여 일본의 육군에게 철군명령이 하달되었다. 철수의 루트는 순천이 마주하고 있는 광양만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통해서 일본으로 가야 한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의 함대와 진린의 명나라 함대가 순천 앞바다에 집결하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소서행장의 군대와 전투를 하게 된다.



노량바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2월 15일 밤 10시경 순천 왜성의 봉쇄를 풀고, 노량해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명나라의 진린과 조선의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새벽 2시경 칼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겨울 바다에서 왜군과 대 혼전을 시작했다. 최대 결전은 새벽 4시경 시작되었다. 각종 총통으로 함포사격을 가하고 불 지른 나뭇단을 던지며 불화살을 퍼부으니 적선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불타기 시작했다. 이날의 전투는 날이 밝아서도 오전 내내 계속되어 정오 때가 되어서야 아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2월 16일 아침 9시경 장군은 왜놈이 쏜 탄환을 맞아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남해 노도

한양을 넘볼 수 없을 만치 아득한 땅 남해는 때를 잘못 만난 선비들에게는 눈물의 유배지였다. 조선시대에 약 30명 정도가 남해에 유배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다. 김만중은 남해의 노도에서 적적하고 고단한 유배생활(위리안치)을 했는데, 노도는 1985년 까지만 해도 등잔불을 켜고 살던 오지중의 오지였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서 노를 많이 만들어서 노도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김만중은 이곳에서 살던 3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국문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김만중은 이곳에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진주성
사적 제118호  <![endif]>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1차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1차 진주성싸움이다.

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 휘하의 왜군 2만여 명은 수 천 개의 죽제(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의 승리로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이후 전쟁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촉석루

백제 때의 거열성터였다고 하지만, 진주성을 언제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에 의하면 고려 말인 우왕 3년(1377)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을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철통같이 막아 낸 관문이었다. 이곳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1차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싸움이다.



진주성 의암

2차 진주성싸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였다. 이때 관기였던 논개가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깍지 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와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왜군에게 조선 여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촉석루 바로 앞 절벽 아래에 작은 섬처럼 떠 있는 바위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들었던 의암이다.



김시민장군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육전에서 조선 측이 거둔 최초의 대승이었고, 김시민의 목숨과 바꾼 승전이기도 했다. 전란이 끝나고 공을 가리는 자리에서 이순신, 권율, 원균 등이 1등 공신의 반열에 오른 반면, 김시민장군은 2등 공신에 그쳤다. 3천8백 명이 2만여 왜군을 물리친 상상을 초월한 6일간의 전투, 그 승자의 이름이 2등 공신에 그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8전 8승의 전공을 세운 김시민이 아니었던가.



상족암
천연기념물 제411호

지질시대란 지구표면에서 지각이 형성된 이후부터 현세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현재 절대연령으로 측정된 지각 중 가장 오랜 암석이 38억 500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이르면 공룡 발자국보다는 우선 주변 풍광이 시선을 휘어잡는다.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채석강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못할 것이 없는 뛰어난 풍광이다. 게다가 변산 채석강에 선 볼 수 없는 미로 같은 해식동굴도 있다.



상족암의 공룡발자국

상족암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룡이 집단 서식했음을 증명해주는 발자국 화석지로서, 고성군 덕명리 제전부락 앞에서 남서쪽 약 6km지점 실바위까지의 해변 갯바위에는 수많은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밀집해 있다. 이곳이 공룡 집단 서식을 증명하는 세계 유일의 공룡발자국 화석지이다.



공룡발자국 답사

이곳의 널찍한 갯바위에는 여기저기에 마치 커다란 전복 껍질로 눌러놓은 듯한 길이 30cm쯤 되는 둥글고 길며 주변보다 조금 밝은 색의 무늬들이 보인다. 어떤 것은 마치 물갈퀴가 달린 오리발 같은 형상이다. 깊이는 대개 3∼5cm. 이런 자국들이 10여 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직선상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공룡의 발자국이다.



한산섬
사적 113호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은 곳이고 앞바다 한산해역은 세계 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대첩 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지명치고 이 충무공과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충무공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섬이다. 그래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보다「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충무공의 우국 심정이 담긴 시조로 더 잘 알려진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영을 여수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은 한산도는 견내량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으며, 만의 하나 있을 수 있는 거제 바깥바다로의 진출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순신은 이곳에서 4년 반 동안 남해 바다를 굳건히 지켜낸다.



한산섬 충무사

충무사는 이 충무공의 사당이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를 쳐부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도고 헤이야찌로 제독은 “나와 넬슨은 비교할 수 있지만 나와 이순신을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실제로 동해해전은 이순신의 학익진을 변형시킨 丁자 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일본 해군의 창설 초기 일본군은 이순신을 연구하였으며, 이순신을 존경하는 것이 해군의 전통이 되었다. 그들은 일년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참배하였다.



제승당

제승당은 그가 통제사의 큰일을 맡으면서 손수 지휘하여 지은 집이다. 1593년 8월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하였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던 운주당을 세웠는데, 정유왜란 때 폐허가 되어버린 이 건물을 1739년에 다시 세우면서 "제승당" 이라 이름 하였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에서 쓰여 졌고, 많은 시도 남긴 곳이다. 충무사는 이 충무공의 사당이다.



한산섬 수루

한산섬 앞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진 정자인데,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자주 올라 왜군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다. 이곳에서 읊은 시조를 통해서 당시 충무공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섬 앞바다

통영주변의 섬과 바다는 충무공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중에 한산섬은 섬전체가 충무공의 유적지 이고 그 앞 바다는 세계 4대해전 가운데 하나인 한산대첩을 이른 곳이다.



한산대첩지에 세워진 거북등대

거북선은 뱃전에 창칼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았던 고려시대의 검선과 화포기술, 조선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노군을 보호하기 위해 판으로 덮개를 씌운 전선인 판옥선이 종합된 것으로서 마치 바다에서의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옛날의 해전은 배를 적선에 가까이 붙여서 병사가 적선에 뛰어올라 전투를 벌이고 적선을 장악하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러나 거북선은 배의 외판이 철편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송곳 같은 칼침이 촘촘히 꽂혀 있기 때문에 적선이 가까이 다가오더라도 적병들은 거북선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거북선에 사용된 소나무는 당시 배의 건조에 사용된 다른 목재보다 강도가 매우 컸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최선봉에서 적선과 충돌하며 좌충우돌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고, 동시에 거북선 내에 장치된 각종의 화포를 쏘아 적선을 파괴, 침몰시키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해금강
명승 제2호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갈개마을의 남쪽 약 500m 해상에 위치한 바위섬(해발 약 116m, 면적 약 0.1㎢)을 거제해금강이라 부른다. 두 개의 섬이 맞닿은 해금강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1971년 명승 제2호로 지정되었다. 지형이 칡뿌리가 뻗어 내린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갈도(갈곶도)라는 이름보다는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해금강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주위의 경관으로는 해금강 최고의 비경인 십자동굴을 비롯하여 사자바위, 부처바위, 촛대바위 등 기이한 암석이 많다. 그밖에 환상적인 일출과 월출로 유명한 일월봉도 있다.



외도

깨끗하고 푸른 바다 빛의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에 있는 외도 해상농원은 척박한 바위투성이의 버려진 섬을 한 부부가 30년간 자연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섬 전체가 정원처럼 꾸며진 해상 식물공원이다.

지중해에 와 있는 듯한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의 이 공원은 원시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1만 3천 평의 수목원을 조성하였고, 코코아 야자수, 선인장 등 740여종의 아열대식물이 가득하고 은환엽, 유카리, 스파리티움, 마호니아 등 천여가지의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희귀식물이 코발트 빛 바다 풍경을 더욱 눈부시게 한다. <![endif]>



외도

섬 전체를 덮고 있는 약 4만 5천여 평의 동백 나무숲, 향나무, 옥향나무, 밀감나무 등 갖가지 사철나무와 종려나무도 들어서 있다. 비너스가든, 조각공원, 천국의 계단, 식물원, 전망대, 아열대식물원, 야외음악당, 산책로 등이 유명하다.



외도의 비너스 가든

이곳은 원래 초등학교 분교의 운동장이 있던 자리인데, 이창호 최호숙 사장이 버킹검의 후원을 모티브로 직접 설계하였다.



비너스 가든

이곳은 외도 해상농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지중해를 연상하는 각종 건축물들과 곳곳에 놓여있는 비너스 상, 그리고 동백나무 프레임이 잘 어울려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이 아름다운 정원이다.



외도 조각공원

놀이조각공원은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즐겨하는 전통놀이들을 원광대학교의 김광재 교수가 이란대리석으로 재미있게 형상화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멀리 거제도를 배경으로 한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은 국내의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에 있는 한 작품을 흉내 내고 있는 다영이의 모습이 익살맞다.



조각공원에서



거제 포로수용소 역사관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역사교육 장소인 이곳은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생겨난 수많은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치한 포로수용소자리에 만들어진 유적공원이다. >



탱크전시관

거제시에서는 유적지 일대의 1만 5천여 평에 6·25전쟁 당시 수용소 130만 평에 설치되었던 시설을 축소 건립하였고, 수용소 내부건물도 복원하여, 민족교육의 산실로 개방하고 있다.



한국전쟁 상황 전시관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유적관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의 사진은 프리쇼 존의 탱크전시관이고, 아래의 사진은 한국전쟁 존에서 현장학습보고서의 문제를 풀고 있는 역사기행 참가자들의 모습이다.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

지호의 모습이 가장 실감나네. ㅋ



낙동간 하구언

하구둑(하구언)은 하천의 정상적인 기능유지와 물자원의 효율적인 이용 등의 기능을 가지는 시설이다. 특히 하천의 하류부근에서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막아 염해를 방지함과 동시에, 헛되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던 물을 하류에서 막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또 하구언의 경우 홍수 때의 물 관리와 평상시의 염해방지, 그리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이와 같이 하구언은 물 관리에 대한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하천 관리시설이다.



낙동강 하구 에코전시관

낙동강 하구의 철새 도래지에 세워진 전시관인데, 인간과 환경을 주제로 다양한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철새 도래지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는 오랜 기간 퇴적물들이 쌓이면서 생겨난 일종의 모래톱이다. 즉 물의속도가 느린 강하구에 침전물들이 계속 쌓여 생겨난 곳이다. 오랜 기간 동안 모래톱이 생성되면서 갈대숲이 만들어져 철새들에겐 더없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그래서 겨울이면 많은 철새들이 이곳에 와서 겨울을 나는데,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부산 원양어선 부두

자갈치시장은 우리나라의 가까운 바다(연근해어업)와 먼 바다(원양어업)에서 잡아오는 생선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곳이다. 그래서 자갈치 시장은 어업의 전진기지인 항구에 접하여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수많은 어선이 자리 잡고 있다



자갈치시장

항구를 통해서 들어온 싱싱한 생선은 매일 새벽 3시경에 열리는 수산물 경매시장을 통해서 전국각지로 팔려나간다.



자갈치시장

자갈치 시장은 "오이소,보이소,사이소"하며 외쳐 되는 억척스러운 경상도 아지매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파닥거리는 생선들의 물 튀기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로 늘 시끌벅적한 정겨운 부산의 시장이다.



태종대

태종대는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이곳에서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의 절경을 즐겼다는 것에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태종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궁인들이 마중을 나와 이곳에서 만나 연회를 베풀었다는 장소로 사용되어 그것이 유래가 되었다고도 구전되어 온다.

영도다리를 지나 영도해안을 따라 9.1㎞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태종대유원지는 54만 2천 평의 면적에 해발250m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해송을 비롯한 120여종의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으며, 해안에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태종대 유람선

태종대는 옛날의 동래부에서 남쪽으로 30리가 되는 절영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등대에서 남쪽으로 돌아 절벽 비탈로로 10m쯤 가면 해안가 쪽에 암석이 비바람에 침식되어 낮아진 반반한 넓은 자리(앞페이지 사진에서 붉은색 퇴적암이 있는 곳)를 태종대라고 한다.

사진은 유람선을 타고 태종대 인근은 관광한 후 배에서 내리는 탐사팀의 모습이다.



몽돌해변

태종대유원지에 푸른 해안선을 끼고 울창한 산림과 곳곳에 깎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천연자갈로 덮인 두곳의 자갈마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시원한 바다바람에 땀을 식히며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바다와 절경을 구경하면서 도시생활의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뚫어내는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다.



동삼동 패총
사적 제266호

패총(貝塚)은 조개무덤이라고도 한다. 조개껍질이 지닌 석회질로 해서 그 안에 있는 토기, 석기 및 짐승의 뼈 ·뿔 등을 잘 보전하여 고고학상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개무지가 이루어진 것은 농경이 이루어지기 이전, 또는 원시농업의 단계나 수렵·어로 등 일종의 채집경제의 단계의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형성되었다가 농경생활이 본격화되어간 청동기시대에는 거의 형성되지 못하였다.

동삼동패총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패총이다.



조개가면

동삼동패총에서는 신석기 인들의 정신세계의 흔적을 보여주는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개가면과 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이다. 이 중에 곰 모양 토우는 곰을 형상화 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의 곰 숭배신앙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조개 가면은 마을의 공동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된 것으로 실제로 착용했다기 보다는 의식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동삼도 패총박물관

동삼동 패총은 남해안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또한 여러 문화층이 겹쳐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연구에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동삼동 패총은 남해안 지방의 신석기 문화내용과 상호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건테이너 부두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은 1906년에는 처음으로 부두축조공사를 시작하여 1945년까지 1,2,3,4, 부두와 중앙부두를 축조하여 근대항만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고, 그 후 부산항 1, 2단계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자성대 컨테이너부두를 비롯한 여러개의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국제여객부두 등을 축조하였다. 1985년 이후 3단계, 4단계 개발사업으로 컨테이너터미널을 축조하여 늘어나는 컨테이너화물 수요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현재 부상항에는 자성대 신선대 감만 우암 감천 그리고 최근 개항한 신감만부두의 총 6개 컨테이너 전용 부두에 20여개의 선석을 갖추고 있으며 세계 제5위의 처리 실적을 가지고 있다.



유엔군 추모공원

UN기념공원은 1950-1953년의 한국전쟁 중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다가 전몰한 장병들의 영령을 위하여 1951년 유엔군 사령부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며, 1959년 설치된 세계유일의 UN기념공원이다. 상징구역에 날리고 있는 국기들은 한국을 포함한 유엔 22개국의 귀중한 희생을 존중하고, 그들의 공동 노력을 상징하고 있다.



유엔군(터키군) 묘역

한국전에서 숨졌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영연방 국가 386명의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영연방 위령탑이 묘역의 낮은 편에 있고, 2개의 터키 기념비와 1개의 그리스 기념비가 상징구역의 서쪽에 있다. 이들은 그들 나라에서 봉납한 것이며, 또한 호주 조각가가 제작하여 기증한 호주기념비는 아래쪽 호주묘역에, 캐나다 참전협회가 제작 설치한 캐나다 기념비는 캐나다 묘역에 각각 봉납되어 있다. 추모관과 기념관은 1964년과 1968년 유엔에 의하여 각각 건립되었다.

주묘역은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터키, 영국, 미국 등 7개국의 묘역이 있다.



유엔군추모공원(묘지)

UN 기념공원의 상징구역에는 한국전쟁 중에 참전한 21개국의 국기와 대한민국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되어있으며, 상징적인 의미로 11개국 유해의 일부 또는 전부의 묘역이 있다.



여행을 마치며

5월6일 새벽 2시 30분에 이천을 출발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1,000KM를 달리며 남해안을 답사한 남해안 기행팀이 UN기념공원의 상징구역에서 ‘나 자신만을 위하여가 아닌’삶을 살 것을 결심하며, 여행을 마무리하고 있다.

옆의 사진은 안장자 현황이 벽에 새겨져 있는 정문광장인데, 정문광장에 가득한 붉은 꽃이 우리를 “희생의 삶으로” 초청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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