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궁궐로 떠나는 조선시대 역사탐험 | 조회수 : 153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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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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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223호
인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조정과 품계석
조정(정전의 마당)에는 큰 행사 때 천막(구름차일)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던 쇠고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근정전 영역에는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기 위하여 물은 담는 용기인 드므, 하늘의 정기를 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려는 임금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정, 그리고 새가 드나들거나 집을 짓지 못하게 한 장치인 부시와 오지창 등이 있다.
편전인 사정전과 만춘전, 천추전
편전은 임금님의 집무실인데, 이곳에서 회의도 하고, 명령도 내렸다. 임금님이 독단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고, 신하들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천추전과 만춘전도 편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이곳에는 온돌이 깔려서 임금님이 주로 겨울에 업무를 보시던 곳이다.
궐내각사가 있던 터
임금님이 일하시던 정전과 편전을 제외한 모든 국가기관이 모여 있는 영역을 궐내각사라고 한다. 궁궐밖에 있던 기관은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궐내각사는 정승들의 회의장소, 도서관, 내시들이 일하던 내반원, 임금님과 학문을 토론하던 옥당, 흠경각과 같은 관측기관, 내의원, 소주방 등이 있다. 임금님을 보좌하던 궐내각사는 거의 일제 강점기 때 헐리고, 지금은 잔디만 자라고 있어서 안타깝다.
수정전
수정전은 세종대왕 때는 학문기관인 집현전이었는데, 세조 때는 왕실의 문서를 정리하던 예문관으로 사용되었다.
경회루
경회는 '똑바른 사람을 만나야 경사스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회루의 잡상은 모두 11개(보통5개, 숭례문 9개, 근정전 7개)나 되는 거대한 누각인데, 왕의 산책 장소, 경사스런 일의 연회, 사신들의 접대, 문무과의 과거시험, 관사(활 쏘는 스포츠), 기우제를 드리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모의가 이루어 졌고, 왕의 국문이 열렸으며, 공신록에서 박탈된 사람들의 이름을 태워 없앴다고 한다. 연산군 때는 이곳에서 흥청망청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강녕전
강녕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임금님이 쉬시던 공간이고, 교태전은 중전마마가 쉬시던 곳이다. 건물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9개방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한 곳에서 왕(왕비)이 침수에 들면, 다른 방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입직하였다.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며졌다.
강녕전과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그것은 용은 임금님을 상징하는데, 다른 용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며, 교태전은 하늘과 땅이 합하는 것을 막는 방해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원전 뒤뜰의 우물과 앵두나무
함원전의 우물과 앵두나무와 문종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문종이 세자 시절에 소갈증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세종)를 위해서 앵두나무를 심어 당분을 보충해 주었다고 한다. 문종은 대기신전을 발명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교태전 뒤뜰의 아미산 굴뚝
경회루의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산인데, 화계(꽃계단)를 만들고, 기화요초를 심고 석조물을 설치하고, 굴뚝을 세웠다. 굴뚝은 붉은 벽돌로 쌓고, 가운데 회벽을 만든 후 사군자, 모란, 소나무를 그려 넣었다.
자경전 꽃담
자경은 "왕실의 어른들에게 경사가 있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담장이나 굴뚝에 장수와 건강과 관련된 무늬를 새겨 넣었다. 담장에는 매화, 천도복숭아, 모란, 석류, 꽃과 나비, 국화, 대나무 등의 무늬가 있다.
자경전 굴뚝
십장생굴뚝에는 십장생이 그려져 있는데, 오래 사는 장수물들이다. 이 굴뚝에는 소나무, 해와 구름, 학, 연꽃, 사슴, 백로, 원앙, 거북, 인동 당초, 영지, 나티(도깨비 얼굴), 학, 박쥐, 불가사리(불을 잡아먹는 동물) 등이 그려져 있다.
경복궁 향원정
향원정은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만든 연못으로 왕과 가족들이 휴식하던 후원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청와대까지가 후원이었는데,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어서 향원정 일대만 남아 있다.
집옥재
집옥재는 임금님의 서재 또는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며, 왕의 어진이 봉안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건청궁
1895년 8월20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주도 아래 일본 자객들에 의하여 명성왕후가 시해된 곳인데, 이때 명성왕후의 춘추는 45세였다. 일본의 자객들이 건청궁의 옥호루에 침입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자선당
이곳은 세자와 세자빈이 기거하면 공부를 하던 곳이다. 세자가 머무르던 곳을 동궁(자선당)이라고 하였는데,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어서,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직단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사를 착수하여 설단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과 신문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의 동·서 양단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 서단에는 국직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를 각기 세워 후토씨와 후직씨를 배향하였다.
사직단
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주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 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와 선농·선잠·우단을 제사지내는 중사, 그 밖에 기곡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명정전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16년에 재건축된 건물이다.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님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던 곳이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 사도세자가 쌀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인문
선인문은 서린문이라고도 하며, 동궁의 정문이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가 폐출되어 이 문으로 나가 사사되었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사되어 이 문으로 나갔다. 사도세자가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힌 후 이 문 앞으로 옮겨져서 죽었다.
숭문당
'崇文堂'의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관천대
이 관천대는 소간의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서운관지」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곳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
창경궁 후원
관천대 주변의 가을풍경은 창경궁에서도 으뜸이다. 역사기행 팀원들이 이 숲길을 걸으며, 조별로 창경궁 탐험하고 있다.
함인정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지은 함인당을 인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함인정이라고 하였다. 영조 때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을 이곳에서 접견하였고, 관료와 유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다.
경춘전
순조는 경춘전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 정조와 아들 헌종이 때어난 곳이며, 순조 15년에 할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환경전
환경전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세자, 세자빈이 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인조의 장자_9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2달 만에 급사함), 효명세자(순조의 장자_익종)가 승하하였으며, 익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하였다. 영조 때는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풍기대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 2천 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 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금천교
금천교는 1411년(태종11)에 축조된 돌다리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비단 금(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금천교이다.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상, 북쪽의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을 삼았다. 다리의 중간에는 귀면(도깨비얼굴)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진선문
인정전
국보 225호인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행사가 치러진 궁궐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선정전
보물 814호인 선정전은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병풍을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 잡으며, 한쪽에는 사관이 앉아서 국사에 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라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실록이 편찬되었다.
희정당
보문 815인 희정당은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의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 있다. 내부의 양쪽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총석정절경도>가 결려 있다. 남행각의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대조전
보물 816호인 대조전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을 하고 있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낙선재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고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종효황후)가 1966년까지 거쳐하였으며, 덕혜옹주와 이방자여사 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쳐하던 곳이다.
부용지와 부용정
조선 궁궐의 대부분 연못은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내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은 십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합루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의 후원에 규장각을 짓도록 명했다. 규장각은 개혁정치의 상징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이나 서얼출신 학자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주합루의 1층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다.
영화당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현재의 건물은 1692년(숙종18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기도한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블노문
불노문은 하나의 통돌을 깍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애련지와 애련정
숙종 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연경당
1828년(순조28년)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 칸의 민가 형식의 집이다. 대문인 장락문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주자가례를 따라 주인 대감의 일상 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덕수궁의 대한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가을이 깊은 덕수궁
중화전
중화전은 1902년 건립된 덕수궁의 법전이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당시에는 이곳 중화전을 짓기 전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현재의 즉조당이 태극전이란 이름으로 법전의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2월 태극전은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1902년 현재 중화전의 위치에 중층규모의 중화전을 새롭게 건립했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현재의 덕수궁 영역이 잿더미가 되면서 중화전은 옛 모습을 잃고, 지금처럼 단층 팔작지붕으로 1906년 재건된다. 이는 당시의 궁핍한 재정상황과 더불어 나날이 쇠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덕홍전와 오얏꽃 문양
함녕전 옆에 있는 전각이 덕홍전이다. 원래 이곳 덕홍전 자리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이 있었다.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이다.
덕홍전의 용도는 주로 외국 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덕홍전의 샛담과 유현문
벽돌로 쌓은 유현문의 홍예와 지형에 따라 담장의 높낮음에 변화를 준, 담의 뇌문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함녕전
함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쓰였는데, 1907년 순종이 즉위 한 뒤 잠시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강제 양위 당한 고종은 수옥헌에 머물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다시 함녕전에 거처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고종이 이곳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였다.
석어당
석어당은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물이며, 단청을 칠하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2층은 석어당 안 서쪽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누마루로 되어 있는 이층은 사방의 창문을 모두 열면 맞바람이 치도록 되어 있고, 특히 종도리에 먹으로 용을 그려 넣은 점도 특이하다.
정관헌
함녕전 뒤편의 화계를 정원 삼아 위치한 건물이 바로 정관헌이다. 이름 그대로 덕수궁 일대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靜觀)'있는 셈이다. 1900년 건립된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한 건물이다. 사바틴은 1897년 을미사변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즉조당과 준명당
석어당 뒤편에 준명당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 즉조당이다.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당시 경운궁이었던 이곳으로 고종이 환어할 당시 이곳의 이름을 태극전이라 짓고, 1902년 현재의 중화전 건립 전까지 법전과 편전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석조전
석조전은 1900년(광무 9년)에 착공하여, 1909년(융희 3년)에 준공한 반 지하에 2층 화강암 석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J.M.Brown)의 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애초 석조전은 경희궁에 짓기로 한 것을 브라운의 주장을 따라 이곳 덕수궁에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덕수궁이 당시 영국 공사관과 이웃해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전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이다.
경희궁 숭정문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하였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이다.
종묘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므로 나라의 문을 연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르시는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이 아주 중요했는데, 종묘는 이러한 조선 왕조의 제례문화가 깃들여있는 아름다운 문화재이다. 조선왕조 500년(정확히는 519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교문화 중 가장 뛰어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종묘의 중지당
어숙실
어숙실은 왕이 목욕하고 재계하며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동문
왕과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한 후 정전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동문
왕과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한 후 정전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정전의 기둥
영녕전
영녕전은세종 3년(1421) 정전에 모시던 태조의 4대조목왕, 익왕, 탁왕, 환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실 4칸, 동·서익랑 협실 각한 칸의 별묘로 처음 지었다.
악공청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한 악공들이 준비하며 기다리던 곳이다.
사도세자의 융릉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헌경왕후 홍씨가 묻힌 합장릉이다. 사도세자 <이선>은 1749년(영조 25년) 부왕을 대신하여 나랏일을 돌보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의하여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영조38년(1762년)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후회하며,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즉위년(1776년) 3월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이라고 추상되었고, 수은묘도 영우원으로 바뀌었다. 영우원은 1789년(정조 13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어 다시 현륭원으로 원호가 바뀌었다가 1899년(광무 3년)에 장조의 묘호인 융릉으로 올렸다. 사도세자는 1899년 12월 19일 장종에서 장조로 다시 바뀌고, 다시 의황제로 추존되었다.
화성의 동문(창룡문)
봉돈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밤에는 횃불(烽)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시설물이다.
동북공심돈
공심돈은 가운데가 비어있는 초소인데, 계단이 소라껍데기처럼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
연무대(동장대)
장대는 장수가 머무는 지휘소이며, 군사를 훈련시키는 곳이다. 화성에는 두 개의 장대(서장대, 동장대)가 있다.
수어장대(서장대)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있는 장수의 지휘소이다. 이곳에서 정조대왕이 군사훈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서노대
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쇠뇌)를 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노(쇠뇌)는 석궁처럼 생긴 조선시대의 무기이다.
서포루
포루는 포를 쏘는 곳이 아니라, 무기를 보관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장소이다.
서북포루
화서문(서문)
화성의 서문으로 창룡문과 크기와 모양이 똑같다.
장안문(북문)
화성의 북문인데, 왕의 행차를 가장 먼저 맞이하던 곳이다.
팔달문(남문)
화성의 남문으로 교통의 요지인 수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방화수류정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이다.
화홍문
화홍문은 수원천이 지나는 물길인데,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름다운 곳이다.
동북포루
동암문
화성에 설치된 비밀 문인데, 적의 눈을 피해서 사람이나 물자를 들여오기도 하고, 내보내기도 하던 문이다.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으슥한 곳에 조그맣게 만들었다.
화성 성벽
화성의 성벽은 허리를 잘록하게 쌓아 적군이 쉽게 성벽을 타고 오를 수 없도록 설계했다. 성벽 윗부분이 다시 바깥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이기 때문에 적군이 성벽을 오르다 매우 당황 했을 것이다.
서울에는
궁궐이 다섯 있습니다.
궁궐이란 왕이 사는 곳입니다.
왕도 사람이기 때문에
먹고 자고 쉬고 놀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일상생활 외에도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궁궐에는
왕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왕의 가족들도 살았고,
그들을 수발드는 궁녀나 노복들도 살았으며,
관원, 군인, 내시, 상인 또는 외국 사신 등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따라서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습니다.
올 가을에는
조선시대의 궁궐들과
종묘, 사직단을 답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둘러본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닙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나
예술적 가치 면에도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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