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백제의 숨결 가득한 충청남도 역사기행 | 조회수 : 1103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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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계룡사, 계룡갑사, 갑사, 갑사사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가 창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가 당우(절집)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갑사계곡
갑사로 오르는 골짜기는 봄 여람 가을 겨울이 모두 아름답다. 특히 가을에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골짜기 가득한 단풍이 황홀하다.
갑사 당간지주와 철당간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두 개의 받침대를 말하며, 당간은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 당(깃발)을 달아 두는 기둥을 말한다. 옛날에는 사찰 입구에 당간을 세우는 격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갑사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연결하여 현재 24도막이지만, 본래는 28도막으로 28개의 철통이던 것이 1893년(고종 30)에 벼락을 맞아 4도막이 부러져 떨어져나갔다고 한다.
석보상절 목판고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지은<석보상절>을 개고해 합편한 책이다. <월인석보>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 양 대에 걸친 약 13년 동안에 이룩된 사업으로, 석가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이며,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국문학 상 귀중한 문헌이다.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사적 제387호
우금치고개는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전개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최후의 격전지이다.
약 3만을 헤아린 농민군은 1894년 10월 23일부터 이인, 효포, 웅치에서의 싸움에 이어 11월 8일 드디어 우금치에서 결전을 벌이게 된 농민군은 고개로의 진격과 후퇴를 무려 40~50차례를 거듭한 혈전 끝에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은 이 싸움 후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송산리 고분군
사적 제13호
송산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10여 기가 있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은 7기이다.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웅진백제)부터 6세기 초반에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벽돌무덤인데, 백제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백제 고분으로서는 유래가 드물게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백제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송산리 고분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는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봉분은 지름 약 20m의 원형으로 되어 있고, 널방은 연화문전, 문자전 등으로 아치 형태로 쌓아올린 단실묘이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고분의 발굴을 3달 여 만에 마무리 짓는 등, 너무 급하게 발굴함으로 학술적 가치를 떨어뜨린 아쉬움이 있다.
송산리 고분
역사를 탐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송산리 고분을 탐험하는 도중에 쉬고 있는 역사기행팀의 모습이다.
공주 공산성
사적 제12호
백제시대에 쌓아올린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토석혼합식 산성인데, 475년(문주왕 1)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성터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루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조선 중기에 개수된 것이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토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산성 쌍수정
인조가 이괄의 난 때 난을 피하여 머물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두 그루의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는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유역의 한산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이 죽자 쫓겨 내려온 곳이 공주이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이곳에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 삼았는데, 발굴조사 결과 제법 규모가 큰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공산성의 성곽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토석혼축 산성으로 둘레 2,660m. 면적 21만m2이며, 금강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성의 구조는 석축이 약 1,925m, 토축이 약 753m, 동문지 밖의 토성 467m까지 포함하여 전체가 2,660m이며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높이 약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 보수되어 있고,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져 있다.
견훤묘
후백제의 초대 왕이며, 황간 견씨의 시조이다. 신라에 태어나 비장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00년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으며,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한 후, 김부를 왕(경순왕)으로 세워놓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었고, 934년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이 금산사에 유폐했으나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 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황산(논산)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미내다리
미내다리의 명칭은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가 아닌 평교였으나 영조 때 강경과 황산에 살던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재물을 모아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현재의 다리를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3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일의 대교였다.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 때문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은진미륵과 석등
보물 제218호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높이가 l8.12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다. 이 불상의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 일(一)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계백장군묘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74호
나당 연합군이 5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백제의 의자왕은 계백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자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이다.
윤증고택
논산읍에서 공주 쪽으로 가다보면 산줄기로 둘러싸인 남향바지 아늑한 자리에 백의정승이란 불렸던 윤증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효종 때 지어진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ㅁ자 평면의 안채 모퉁이에 ㅡ자로 지어진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여기에는 미닫이 여닫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구조의 문이 있어서 선조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사랑채에는 마루가 높다랗게 꾸며져 있어서 멀리 펼쳐지는 전원의 경관과 주변의 산들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윤증고택의 사랑채
윤증고택은 건물들이 나뉘고 묶이는데 있어 큰 특색이 있다. 건물들이 서로 묶이되 각 건물의 개성은 거의 유지된다는 점이다. 윤증고택에는 이런 특색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수법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담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법이다. 윤증고택에서 담은 건물들을 밖에서 크게 둘러싸는 것이 아니라 건물들 사이에 놓여진다. 필요한 부분만큼만 최소로 묶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각 건물의 개성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윤증고택의 안채와 사당
한국전통가옥은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개의 건물은 서로 흩어져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묶여져 있기도 하다. 윤증고택은 크게는 사랑채, 사당채,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또한 흩어져 있음과 동시에 서로 묶여 있다.
윤증고택의 연못
고택의 바깥마당에는 제법 규모가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은 전형적인 방지(ㅁ자형)이며, 동북쪽 구석진 곳에 둥근 섬이 자리 잡고 있다. 섬에는 배롱나무가 심겨져 있고, 주변에는 벚나무가 아름답다.
부소산성
사적 제5호
부소산성은 백제의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후 부여를 방호하기 위해 부소산에 축조한 성인데, 북쪽으로 백마강(금강)이 흐르고 있는 천연적인 요새로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산성이었다.
부소산성의 형태는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1차적으로 테뫼식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를 포곡식으로 축조하였다. 산성 안에는 백제시대 군량미를 비축하던 창고인 군창지 와 절터,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수혈주거지 등의 유적이 있다. 부소산에는 백제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낙화암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낙화암
백제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되고 백제700년의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 궁녀들은 부소산 북쪽 바위 절벽에서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러운 삶은 사느니 보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리라’ 하며 몸을 던졌던 곳이다. 여인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숭고한 넋이 어린 곳이다. 이곳에 1929년에 부여군수 홍한표가 백화정을 지었다.
백마강과 낙화암
3천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절벽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모습이다. 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역사를 굽이 돌아 흐른다.
백마강
구드레나루
백마강 가의 구드레나루는 지금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지만, 예전에는 부여에서 청양으로 통하던 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유람선 선착장이 되었다. 구드레라는 말은 일본어의‘구다라’라는 말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말은 ‘큰 나라’라는 말이고, 이 말은 백제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굿들개’가 변한 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곳에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린 기록이 남아 있다.
부여 나성
사적 제58호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흙으로 쌓았기 때문에 무너진 부분이 많아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소산성 동문지에서 시작하여 염창리의 금강 변까지 토축으로 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는 청산성 동쪽에 20 m 정도와, 석목리에서 동문 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희미하게 그 형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백제 수도를 지키기 위한 외곽 성이었으므로 백제 성왕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성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도시 외곽에 쌓은 도성을 말한다.
능산리 절터
사적 제434호
이곳은 백제 때의 절터유적으로 1992∼2000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 절터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 형식이다.
1993년에는 이 절터의 건물지 서쪽 한 구덩이에서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이 널리 알려졌다.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 목탑 자리에서 출토된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288)에는 2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사찰의 창건연대가 백제 때인 567년(위덕왕 14)으로 밝혀졌다.
능산리 고분군
사적 제14호
백제 시대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7기가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그 뒤로 1기가 떨어져 있는데,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만든 시기는 대략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으로 보이는데, 이 무덤들은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남조를 통해 받아들인 문화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소화시킨 백제 후기 고분미술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
국보 제9호
높이 833㎝의 석탑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고 새겨놓았기 때문에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여,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정림사지 석불 좌상
보물 제108호
얼굴이나 몸체가 비바람에 씻겨 형체를 거의 알 수 없는 고려 때의 석불 좌상이다. 하지만 대좌 등에는 연꽃과 인상 등의 조각이 분명하고 당당하다.
정림사지 박물관
궁남지
사적 제135호
<三國史記>권 27 백제 본기 무왕조에 의하면,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을 상징시켰다."하였다. 이러한 규모 때문에 궁남지가 풍류의 장소뿐 아니라 적을 막기 위한 외호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백제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궁남지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으로 하여금 안압지를 만드는데 동기부여를 한 연못이기도 하다.
정산 9층석탑
보물 제18호
고려 초기에 비교적 균형이 잡힌 큰 탑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탑도 그 예 중의 하나이고 특히 9층이라는 점에서 희귀하다.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탑의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초층 탑신은 제법 크고,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나 넓이가 우아하게 체감되어 있다. 상륜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전형적인 형식의 탑으로서 상하 비례가 잘 어울리는 수작이다
보령경찰서 망루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망루의 높이는 10m이고 둘레는 최고 30m에서 최저 15m이며 두께는 1.5m이다. 6·25전쟁 중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성주산 주변 일대에 남아 있던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하여 1951년에 건립한 망루이다. 자연석에 시멘트를 섞어 찰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지붕은 팔각이다. 망루 안에는 목조 계단이 4층으로 되어 있고 안에서 밖으로 사격할 수 있는 총구가 모두 22개 시설되어 있다. 내부에는 약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보령읍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
예로부터 서해안은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불안한 곳이었다. 그래서 서해안 쪽에는 방비를 위한 수영도 세워지고 읍성도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은 곳이 많은데, 그 중에 한 곳이 보령읍성이다.
지금은 보령(대천)이 중심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이곳 주포면이 행정의 중심이었다. 보령읍성은 고려시대에 처음 흙으로 쌓아 올렸다가 조선시대에 돌로 고쳐 쌓았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의 높이는 3m이고, 둘레는 633m가 남아 있다.
홍주읍성 조양문
사적 제231호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요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 때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서문과 북문을 같은 규모로 세웠으며, 남문은 지형이 높아 자연적으로 국방의 요새가 되어 홍예문을 세웠고, 동문은 홍주의 관문인 관계로 서북문과는 달리 크고 화려한 문루를 세웠다. 그 후 대원군이 서문은 경의문이란 편액을, 북문은 망화문이란 편액을, 동문은 조양문이라 하여 친필로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나라의 국권이 없어지자 1913년에 일본인들이 서문을 철거하였고, 다음 해에는 북문을 철거한 후, 다시 동문도 철거하려고 하였으나 홍성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동문(조양문)만은 겨우 철거를 면하였다.
홍주아문
사적 제231호
홍주목 관아 건물 가운에 안회당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이다. 홍주아문은 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곽을 수리할 때 크게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6.25때 불타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관아의 출입문) 중에서 가장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안회당(홍주관아) 후원
이 건물은 홍주아문과 함께 1870년 지어진 동헌으로 정면 7칸, 전체 22칸의 긴 건물이다. 오른쪽의 누마루가 살짝 튀어 나왔는데, 전체적으로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늠름한 자태를 풍기고 있다. 안회당의 뒤에는 홍주목사의 후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풍치 좋은 연못에 <여하정>이라는 육모지붕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홍주성
사적 제231호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1451년(문종 1)에 새롭게 수축된 이후 현종 때 한 번 중수했으며, 1870년(고종 7) 홍주목사 한응필이 조양문, 홍주관아와 함께 고쳐 쌓았다. 이 성은 1906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여 민종식?이세영 등이 일으킨 의병부대가 주둔하며 일본군을 격퇴시킨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해미읍성 진남문
사적 제116호
조선시대에 병마 절도영이 있었던 해미는 인근에서 중심이 되는 고을로서 튼튼한 성곽을 쌓아 올렸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읍성으로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읍성 가운데 전북의 고창읍성과 함께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해이읍성의 성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보기 좋게 뒤덮여 있어서 분위기를 한층 살려준다. 옛날에는 탱자나무 울타리 때문에 탱자나무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은 성 밖에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볼 수 없고, 안쪽에만 길게 심었다.
해미읍성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해미는 태종 때 정해현과 여미현을 병합하면서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태종14년에 병마절도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성종 14년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그 후 효종 때 병마절도영이 청주로 옮길 때 까지 이곳이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마영의 군관으로 10개월 동안 근무하기도 하였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의 길이가 1.8km이고,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려있다.
해미읍성의 호야나무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루를 지나서 가다보면 훌쩍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는데, 300년이 넘은 고목으로 해미의 역사를 지켜본 호야나무(회화나무)이다.
해미가 자리 잡고 있는 내포 땅은 충청도에서도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는 곳으로 18세기 말에 이르면서 급속히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천주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순교자도 늘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1866년에 있었던 병인양요에 이어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지역의 천주교인들이 토포사(도적이나 반군을 잡던 벼슬)가 있었던 이곳 해미 관아에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고 더러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거나 목 졸려 죽기도 하였다. 김대건 신무도 이 나무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해이읍성의 관아
이곳은 해미읍성의 감옥자리인데, 최근에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하면서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본래의 규모는 동?서?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이 2개소, 객사 2동, 포루 2동, 동헌 1동, 총안 380개소, 수상각 1개소, 신당원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 그리고 옥사와 민가 몇 채가 복원되어 있으며, 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산 수덕사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수덕사는 사기에 따르면 백제 말 숭제가 창건하고,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이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 2년(1865)에 만공이 중창한 후로 선종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49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건축수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며 세부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외관은 각 부재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어 보이고, 측면은 특히 아름답다. 우미량들이 이루는 조화와 이들이 벽을 구획한 세련된 구도는 한국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또한 건물의 건립연대(1308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덕사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으로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2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은 1625년(인조 3) 중수하면서 쓰여 진 것인데, 1363년(공민왕 12)에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늦어도 13세기에는 이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건물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건물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길이 없다. 이에 비해 수덕사의 대웅전은 건물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1308년에 건축되었다.
수덕사 목어
절에는 종각이 있는데, 이곳에는 범종, 북, 목어, 그리고 운판이 걸려 있다. 일정한 시각에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친다고 한다.
특히 목어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비게 파 낸 불구인데, 본래 중국의 선원에서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었는데, 그 때마다 때를 알리는 신호기구로 쓰였던 것이다. 모양이 길다랗고 곧게 생겨 꼭 물고기 모양이었는데, 뒤에 와서 현재의 것과 같은 둥근 모양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목탁이라 하여 염불?독경?예불을 할 때에 쓰고, 또 공양할 때, 그리고 대중을 모을 때에 신호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매헌 윤봉길
윤봉길의 본명은 우의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여 싸워서 진적이 없으며, 때로 씨름에 지는 날이면 하루 종일 맞붙어 이길 때 까지 붙들고 늘어졌으므로 별명이 살가지(삵쾡이)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이 개설한 오치서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부흥원,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의 나이 25세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매헌 윤봉길 생가
사적 제229호
매헌이 성장기를 보낸 집에는 저한당(狙韓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이다. 3.1운동 이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수는 없다고 하여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며 애국심을 고취하던 그는 1926년에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위해서 뛰어들었다.
매헌 윤봉길 기념관과 사당(충의사)
충의사는 2001년에 세운 윤봉길 사당으로 영정이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다. 홍살문과 삼문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기념관에는 보물 제568호인 윤의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윤봉길은 23세 되던 해에 <丈夫出家 生不還> 즉“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집을 나간 후, 1946년 6월 16일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조국의 품에 묻혔다. 집을 나가며 세운 뜻을 죽어서나마 이루고 돌아온 것이다.
추사(김정희) 고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3호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양반가문 주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추사고택은 햇볕을 담뿍 받는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의 앞에는 너른 예당평야가 펼쳐있고, 평야 저편에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빠져 나가는 물길이 있다.
이 집을 지을 때 한양에서 나라의 건축을 맡아 하는 목수인 경공장을 불러다 했다고 하며, 더구나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을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 추사 집안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옛집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1977년에 새로 복원한 흔적만 깔끔하다.
추사고택 사랑채
추사고택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양반가문의 주택을 보여준다. 지금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있는데, 본래 곳간채가 더 있었다. 또 대문채와 사당채와 1977년 집을 복원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추사의 지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 갔던 사이에 헐렸기 때문에 변형도 심하게 되었었다고 한다. 고택은 전체가 동향을 하고 있는데, 사당채는 남향으로 되어 있다.
추사고택의 사당
안채의 대청 뒤에 있는 분합문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돌층계와 대밭이 어우러진 운치 있는 길이다.
고택 안채의 바깥문을 나서면 우물이 있는데, 추사가 날 때 우물이 갑자기 말라버리고 뒷산이 팔봉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우물도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묘소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인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지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이기도 하며, 그림과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30세 때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으며,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그린 세한도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의 무덤은 고택을 바라보아 왼쪽에 작은 골을 지난 언덕에 있다. 봉분도 나지막하고, 석물의 치장도 화려하지 않아 고택만 둘러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 묘소 앞 백송
천연기념물 제106호
이 백송은 추사 김정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던 1809년에 연경에서 종자를 얻어 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키운 것이다. 그런데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은 것인지, 가지가 무성하지 못하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어서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세 줄기였던 백송이 지금은 한 줄기만 남아 있다.
온주아문
충남유형문화재 제16호
조선시대 온주(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이 아문(관아의 출입문)은 1871년(고종 8)에 세워졌으며, 동헌은 여러 차례 변형되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건물이다. 위층은 누각이고, 아래층은 통로로 되어 있는 아문을 통과하여 50m 정도 북쪽에 있는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1928년부터 일제의 주재소, 광복 뒤에는 파출소로 사용했다.
읍내리 당간지주
보물 제537호
온주아문이 있는 동네의 입구 공터에 서있는 당간지주이다. 아무런 치장이 없이 모서리만 잘 다듬은 3m 높이의 돌기둥이 아래 위 굵기가 똑같아 힘찬 느낌을 준다. 이 정도 규모의 당간지주가 있었다면 꽤 큰 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당간을 맬 수 있는 구멍을 맨 위에만 해 놓아 아래 쪽에도 있는 다른 당간지주와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맹사성 고택
이 집은 본래 고려 말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다. 맹사성이 다섯 살 쯤 되었을 때, 아버지 맹희도가 온양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최영의 이웃집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했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최영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준 것이다.
맹사성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을 이루어 변형된 ㄷ자, 즉 H자를 이루고 있는데,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고, 양쪽에 날개처럼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의 기둥은 살짝 배흘림기둥이며, 툇간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과는 다르게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데만 사용하는 ‘눈꼽재기창’을 두었다. 집 뒤쪽에 기와를 켜켜이 쌓아올려 만든 굴뚝이 아주 정겹고, 굴뚝위에 작은 기와지붕을 얹어 비를 가린 모습이 앙증맞다.
맹사성 고택의 사당
고택 뒤에는 맹사성과 부친 맹희도, 그리고 조부 맹유 등 맹씨 3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세덕사와 정각이 함께 있으며, 맹사성의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유물전시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고불 맹사성유물 일괄(중요민속자료 225)이 보관되어 있다.
맹씨 행단
나지막한 돌담을 둘러 매우 아늑했을 뜰 안에는 600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맹사성 고택을 <맹씨행단>이라고 하는 것은 맹사성이 이곳에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가르쳤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상징한다.
외암마을
중요민속자료 제236호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 일가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안 이씨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반촌의 면모를 갖추고 반가의 가옥이 생겨났다.
그 뒤 이정의 6대손이며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외암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고 불렀다. 마을에는 조선시대 이정렬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아산 외암리 참판댁(중요민속자료 제195)을 비롯해 영암댁, 송화댁, 외암종가댁, 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집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는데 전통가옥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외암마을
마을에는 구석구석으로 냇물이 파고들어 흐르는 것이 독특하다. 마을의 배산(뒷산)인 설화산이 불(火)기를 뿜고 있는 형상이라 그 불길을 잠재우려고 마을을 휘감고 내려가는 개울을 집집마다 끌어들여 인공으로 조성한 냇물이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작으나마 연못이 있고, 굴뚝을 나지막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침과 저녁으로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연못과 마당에 깔린 모습을 대청마루에서 보면 마치 구름위에 앉은 것 같은 경치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외암마을의 굴뚝
충무공 이순신묘소
1598년 11월19일(양력 12월16일) 54세를 일기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유해는 일단 최후의 진지였던 완도군 고금도에 모셔져 이듬해인 1599년 2월11일에 덕수 이씨의 선산인 아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는 부인 상주 방씨와의 합장묘로 봉분 앞에는 문관석, 무관석 등이 있고, 봉분은 병풍석으로 둘러져 있어 조선시대 고관 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봉선 홍경사 비갈
국보 제7호
고려시대 당시에 이 일대는 한양이나 개경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갈대가 무성하고 도적이 들끓어서 행인들이 이곳을 지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조 8대 현종 때 이곳에 절을 짓고 <봉선 홍경사>라 하였는데, 봉선이란 선친의 유지를 받든다는 의미이다. 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여덟째아들로 불법을 숭앙하여 절을 지으려다 짓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
비갈은 홍경사를 창건한 5년 후인 1026년에 세워졌는데, 글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충이 짓고, 고려조 해서체의 1인자인 백현례가 썼다. 특히 비신을 받친 돌 거북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90도 돌아간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다른 거북들과는 달리 활기차고 생동감 있게 보인다. 이 비의 특이한 것은 ‘비갈’이라는 이름에 있다. 비는 돌이나 나무에 글을 새겨 역사적 사실을 남기는 것을 통틀어 말하는 것인데, 비신이 네모지지 않고 끝이 둥근 것은 ‘갈’이라 하여 형식상 구분하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그 구분이 없어졌다.
660년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백제가 망했으니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도
어언 1,400여 년이 지난 것인데,
그
아득해 보이는 시간도
감히 말하자면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과
지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백년도
못살다 가는 우리가
유구한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을
어찌 다 헤아려 알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1,4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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