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경주로 떠나는 삼국유사 역사기행 | 조회수 : 1268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6-10-16 |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지/ 천/ 으/ 로/
널려있는 역사유적지와
엄청난 양의 유물들
그리고 온갖 신화로 채색된
경주
우리는
삼국유사와 함께
경주의 역사유적지를 둘러보며
삼국유사에 나타난 신화이야기를 통해서
당시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 그리고 세계관을 경험하였습니다.
나정 (사적 제245호)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기원전 70년 어느 날,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의 촌장인 소벌공이 양산 위에서 나정을 바라보니 우물가에서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서, 붉은 빛이 나는 큰 알 하나를 얻게 되었다. 알을 깨어보니 용모가 빼어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이 모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바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이다.
그리고 이 촌장회의는 신라 민주주의의 특색을 지닌 화백회의의 시초가 되었다.
양산재
양산재는 진한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6부촌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진한의 여섯 마을을 말하는데,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무산의 대수촌, 취산의 진지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존이다.
기원전 57년 여섯촌의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서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왕을 삼아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는데, 그후 3대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의 공로와 신라 건국의 의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려주었다. 이로써 신라 여섯 성씨가 탄생하게 되었고, 촌장은 각 성씨의 조상이 되었다.
양산촌, 알평 - 이씨의 조상
고허촌, 소벌도리 - 정싸의 조상
대수촌, 구례마 - 손씨의 조상
진지촌, 지백호 - 최씨의 조상
가리촌, 지타 - 배씨의 조상
고야촌, 호진 - 설씨의 조상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909호)
남간사는 남산에 있었던 절 가운데서도 가장 이름이 높은 절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살던 일념이라는 스님이 글을 써서 신라에 불교를 승인시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알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이 절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이 남간사터 당간지주인데, 남산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이 당간지주는 꼭대기에 십자형의 간구가 있고, 기둥에는 두 대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것이다.
추측컨데, 이 십자형 간구는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경교(기독교의 한 분파)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교는 당나라에 전래된 뒤 약 50년 동안 번성했는데, 이때 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송나라 때에 이르자 거의 잊혀졌고,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포석정 (사적 제1호)
포석정은 신라 임금의 놀이터로 만들어진 별궁으로서, 건물은 없어졌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를 한 것으로 생각되는 전복 모양의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다. 원래는 물이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를 알 수가 없다. 이곳에서 놀이를 즐기던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포석적을 답사하고 있는 2차 기행팀
삼릉 (사적 제219호)
삼릉이 자리잡은 삼릉 계곡은 남산에서 가장 길고 가장 많은 불상이 있는 계곡이다. 이 계곡의 초입에 아달라왕과 신덕왕, 그리고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세 왕릉이 있어서 이 계곡을 삼릉계곡이라고 부른다. 능의 형식은 규모가 큰 원형 토분이며, 표식은 하나도 없고, 상석이 하나 있으나 이것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삼릉의 아침
삼릉의 아침은 아름답다. 특히 숲이 옅은 안개를 토해내는 날 소나무 숲 사이를 걸으면, 천년을 훨씬 더 뛰어넘어 신라의 역사를 호흡하며,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아이들과 함께 아침 일찍 도착한 삼릉의 소나무 숲은 안개를 가득 머금고 우리를 반겼다. 2,000년 가까운 고분의 주인과 오랜 소나무 숲 사이에서 새로 돋아난 어린 소나무들의 가녀린 싱싱함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닮은 듯하여 더욱 기뻣다.
경애왕릉 (사적 제222호)
신라 제53대 경애왕은 본명이 박위응이고, 경명왕의 동생이다. 917년에 이찬으로 상대등이 된 후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즉위하였는데, 왕건, 견훤 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떠치치 못하다가, 927년 11월에 포석정에서 비빈, 종척들과 연회를 하고 있던 중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침입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던 중 협박에 의해 자진하였다고 한다.
오릉 (사적 제172호)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5명의 분묘라 전해진다.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박혁거세가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된 것이다.
알영정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의 왕비께서 탄생한 곳이다. 오릉 경내에는 박혁거세의 왕비로 알려진 알영이 태어났다고 하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시조왕께서 탄생하던 그날에 알영정에서 계룡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홀연 오른쪽 옆구리에서 한 여자아이를 탄생하고 용은 간곳이 없었다. 때마침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인이 북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육부의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 시조의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숭덕전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받드는 제전으로, 세종이 삼국의 시조들에 대한 사당을 지으라는 조서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현재 춘분과 추분에 제향을 봉행한다.
대릉원 (사적 제40호)
이곳은 크고 작은 20여기의 신라고분이 많이 모여 있어 이 고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신라사적공원이다. 직경 10m미만에서 120m까지, 높이 1m미만에서 23m까지, 크기가 다양한 이 고분들은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능묘로 알려져 있으며, 겉으로는 대부분 원형토분으로 되어 있으나 표형분인 쌍분도 있다. 아래의 사진은 하늘을 나는 천마가 그려진 말안장과 금관 등이 출토된 천마총이다.
천마총
이 무덤은 원래 155호분이라 불리어 왔는데,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21대 소지마립간(479-499)이라는 설과 지증마립간(500-513)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천마도는 신라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자락에 진흙 등이 튀어 묻지 않도록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린 네모난 판인데, 자작나무 껍질로 판을 만들어 중앙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당초문(唐草文)을 돌렸다.
미추왕릉 (사적 제175호)
미추왕릉은 죽은 후에도 외적을 막아냈다는 전설 때문에 '죽현능'이라고도 불린다. 능 앞에는 혼유석이 있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이 능 주위에 둘러져 있으며, 전면에는 삼문이 있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여겨진다. 신라 최초의 김씨왕이다.
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칠 때 신라 측은 대부대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래 저항 할 수 없었다. 그 때 돌연히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서 신라 군대를 돕는데 모두들 댓잎사귀를 귀에 꽂고 힘을 합쳐서 적을 물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다만 댓잎사귀만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미추왕이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첨성대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신라시대의 궁성있던 반월성의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은 그 시대로 말하면 관청이 밀집해 있던 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첨성대는 천채 관측을 하던 관청의 마당에 있던 상징조형물로 여겨진다.
전체모양은 신라시대 굽다리 접시의 받침대 모양으로 되어 었는데, 이것은 그 위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머릿돌을 합치면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하며, 네모난 창의 아래와 위로 쌓은 12단은 일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고, 쌓은 돌 362개는 일년의 날 수(음력)가 된다.
기단석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머릿돌은 그 사이를 갈라 8방위를 나타내고, 창문은 정 남을 향하고 있다. 이 창문으로 쏱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서 춘분과 부춘, 동지와 하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첨성대는 절묘한 구조로 되어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계림 (사적 제19호)
물푸레나무, 홰나무, 휘추리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깃들인 숲이다. 《삼국유사》에 호공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라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림이라는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계림 숲의 1차 기행팀
태종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선도산 아래,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능은 신라 태종 무열왕(654-661)의 무덤이다. 본명이 김춘추인 태종 무열왕은 김유신 장군과 함께 신라 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의 완성은 그의 아들 문무왕 때 이루어졌다. 능은 흙으로 둥글게 쌓은 원형토분이며, 밑부분은 자연석을 축대처럼 쌓아서 만들었다.
무열왕릉 비 (국보 제25호)
무열왕릉 비는 사실적인 표현과 능숙한 기법으로 비석조각 중에서도 최대의 걸작이다.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좌우에 3마리씩 6마리의 용이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서악동 고분군 (사적 제142호)
무열왕릉 바로 뒷편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은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으로 추정한다.
김인문 묘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의 조직에 성공했고, 660년(태종무열왕 7) 당나라의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그후 20만 군사를 동원, 당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역이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김유신 묘 (사적 제21호)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은 무덤의 양식이 왕릉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최고의 예를 베풀어 장사를 지냈다. 묘를 지키는 호석으로 12방위 주석에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는 무기를 잡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경주 왕릉에는 몇 군데 12지신상 조각이 보이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에 있어 이 묘를 따를 수는 없다.
김유신 묘를 답사하기 전
장학금 퀴즈대회를 하고 있는 1차 기행팀
노동동 고분군 (사적 제38호)
노동동 고분군은 신라시대의 고분들이다. 모두 3기 중 2기는 발굴 조사되었고 발굴되지 않은 일명 '봉황대'(사진)라고 불리는 고분은 높이22m, 밑둘레가 250m나 되어 단일고분으로는 신라 무덤 가운데 제일 큰 왕릉으로 짐작하고 있다.
노서동 고분군 (사적 제39호)
노서동 일대에는 일제시대인 1921년 우연한 기회에 맨처음으로 신라 금관을 발굴함으로써 이름 지어진 금관총을 비롯하여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참가한 발굴작업에서 금관이 나옴으로써 이름 지어진 서봉총이 있다. 광복 후 국립중앙박불관에 의한 발굴조사에서 많은 유물과 함께 그릇의 바닥 뒷면에 광개토대앙이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옴으로써 고분의 구조와 함께 일대의 무덤들이 4-5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호우총이라 부르고 있다.
금관총
노동동에는 원형고분으로는 가장 큰 봉황대와 금령총 식리총이 있고,노서동에는 호우총, 서봉총, 금관총, 은령총, 옥포총 등이 있다. 사진은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의 모습이다.
봉황대
봉황대는 밑바닥 지름이 82m, 높이가 22m나 되는 거대한 고분으로 너무커서 차라리 작은 동산인 듯 하다. 특히 고분에서 자라고 있는 500년이 넘음직한 느티나무 때문에 더욱 고분이라는 느낌을 받기 힙들다. 왕의 무덤인듯하나 발굴되지 않아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은데, 다만 봉황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건과 관련된 설화 때문이다.
왕건은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도선과 함께 꾀를 부렸다. 경주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봉황형이니 그 배를 침몰 시키기 위하여 흙으로 거대한 봉황의 알을 만들어 배를 무겁게 하여 침몰시키면 신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만든 봉황의 알이 봉황대라고 한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이 고분을 봉황대라고 부른다.
토함산
경주의 동쪽을 둘러 싸고 있는 토함산은 745m로 경주에서 가장높은 산이다. 예로부터 신라 오악(토함산/동악, 선도산/서악, 남산/남악, 소금강산/북악, 낭산/중악)의 하나로 숭앙받았으며, 특히 동해에서 경주 시내로 이어지는 가장 짭ㄹ은 거리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죽어서라도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 염원이 서린 대왕암이 토함산 너머 동해에 있으며, 동악의 산신에 되었다는 석탈해의 탄생과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산자락에 묻혀 있고, 불국사와 석굴함이 이 산에 있다.
안개 낀 아침의 토함산 일출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토함산의 안개가 걷히면, 잇달은 봉우리와 소나무 숲이 한폭의 동양화를 이룬다.
3차 기행팀이 토함산에 올랐을 때는 안개 가득한 산자락으로 아침해가 떠 오르고 있었다.
석굴암의 2차 기행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10)에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에 오르는 계단에서 추위에 떨며 목사님의 설명을 들은 2차 기행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석굴암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당시의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것이었다. 그것은 석굴암의 위치가 문무왕 수중릉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 존재를 뚜렷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신라인들은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 석굴암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장항리사지 5층석탑
절터 / 사적 제 45호
석탑 / 국보 제236호
토함산 산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계곡을 낀 나지막한 대지에 절터가 남아 있다. 좁은 대지의 절터에는 거의 완전한 채로 남아 있는 서탑과 서탑의 북동쪽 약 15m 떨어진 곳에 금당지가 노출되어 있으며, 석조불대좌는 이 금당지 중앙에 있다. 이 불상은 1932년 도구럼에 의하여 파괴된 석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졌다. 동탑은 무너져 계곡에 흐트러진 일부 탑재만을 올려 서탑과 금당지 사이에 놓았다.
서탑도 1925년에 도굴자가 폭파하여 반쯤 부서진 것을 1932년에 복원하였다. 이 탑은 비교적 희귀한 5층석탑으로, 기단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신라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어 신라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각수법이 우아한 불상은 석조여래 입상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상반부의 조각들은 높이 3m에 가까워, 복원하면 4m가 훨씬 넘는 대불이 될 것이다.
대왕암 (사적 제158호)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화장하고,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낸 뒤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큰돌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견대 (사적 제159호)
신문왕이 문무왕을 수중릉에 장사 지내고 맞은편에 대를 쌓고 깜박 잠이 든 사이에 용바위에서 용이 나타나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이견대라 하였다. 신문왕은 이곳에서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한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여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대금의 기원을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국보 제112호)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이다. 중국의 전탑(벽돌탑) 일본의 목탑(목조건축)과 비교해서 생긴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 올 때에는 목조건물 형식의 목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9층탑과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행하는 일을 해낸 것은 백제의 사람들이다. 익산 미륵사지에 남아 있는 한 쌍의 9층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이것을 간소화시켜 현재와 같은 석탑의 구조와 틀로 완성시킨 것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정림사탑은 우아한 세련미를 갖추었지만 힘이 없으며, 안정감이 약하다. 그러나 감은사 탑은 통일된 새 국가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유약한 5층 석탑은 신라인들에게 어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의지를 지닌 감은사 탑을 낳은 것이다.
감은사지 (사적 제31호)
동해 바닷가에서 문무왕릉을 지키던 절이 감은사이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능을 만들고, 그 은혜에 감사드리는 뜻으로 감은사를 지었다. 감은사는 금당아래 공간을 마련하여 용이 된 부왕이 조수를 타고 드나들며 쉴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또 절터의 기단 부분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우리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태극도형을 신성한 상징으로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굴골암 여래좌상 (보물 제581호)
골굴암은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조성한 12개 석굴로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구황동 넓은 평야 한가운데 자립잡고 있는 진평왕릉은 그 동쪽에 명활산, 남쪽에 보문사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이 솟아 있다. 무려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는 밑둘레 약 10m, 높이 약 7m의 원형 토분으로 주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을 뿐이다.
진평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아들이 없었으므로 딸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진평왕의 봉분 꼭대기에 앉은 3차 기행팀
석탈해왕릉 (사적 제 174호)
원형 토분(흙으로 쌓은 무덤)으로, 전면은 평지이나 후면은 약간 높다. 봉분 이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봉토 밑에 둘레 돌을 설치하였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씨 왕으로 62세에 즉위하여, 2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성의 북쪽 양정구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성의 북쪽이라 한 점은 현 위치와 비슷하다. 능의 형식 자체는 특이한 점이 없는 일반적인 형식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탈해는 표류하던 괘짝에서 나왔는데,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鵲)의 한 쪽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궤짝을 풀고(解)알을 벗고(脫)나왔다 하여 탈해(脫解)라고 이름지었다.
굴불사 사면석불 (보물 제121호)
경덕왕이 백률사에 거둥하여 굴불산 밑에 이르자, 땅 속에서 부처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곳을 파도록 명하여 큰 돌을 얻었는데,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음을 신기하게 여겨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굴불사라고 했는데, 그것이 잘못 전해져 굴석사라고 한다. 이 곳에는 화강암으로 된 사면석불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굴불사가 있는 소금강산은 경주의 5악 가운데 북악으로, 이 산의 중턱에는 백률사가 있다. 백률사는 신라가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도록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하여 이룩한 사찰로서 일명 자추사라고도 한다.
분황사 탑 (국보 제30호)
분황사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 올린 모전 석탑이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완성된 분황사 창건 당시의 유물로 추정되며,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의 가장 오랜 작품으로 여겨지며, 건립 연대가 확실하여 조각사 연구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이 탑은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세에 무너져서 현재 3층만 남아 있다. 사각형의 기단 위에 세워진 1층 탑신의 4면에 화강암으로 만든두 짝의 문이 달린 방이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라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동해을 향한 곳에는 물개를, 내륙을 향한 곳에는 사자를 조각하여 두었다. 그것은 동해는 일본을, 내륙은 중국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룡사 터 (사적 제6호)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에 모든 건물이 완공된 것은 아니다.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비로소 완성되었고, 신라 삼보의 하나인 9층목탑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에 완공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왕성인 월성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는 진흥왕이 신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중단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는데,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황룡사에서 출토된 치미
사람의 키롷\도 한 길이 훨씬 넘는 치미를 보면 황룡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치미란 지붕에 기와를 올릴 때 지붕의 양쪽 끝을 장식하는 기와이다.
황룡사 9층 묵탑터
신라 삼보의 하나로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의 요청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고 여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탑은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 몽골의 침략 때, 불타버려 그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황룡사 9층목탑은 한 변의 길이가 22.2m의 바닥에 80m 높이의 탑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올렸다. 그러므로 20층의 건물을 세운 것과 같으며, 거기에 상륜부를 합친다면 어마어마한 높이의 탑인데, 1,500여년 전에 이런 탑을 세울 수 있었던 신라의 기술력이 놀랍다.
경주 국립박물관
녹유귀면와
도깨비기와라고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나쁜 귀신을 쫓는 것은 영악한 귀신이라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별돌이나 기와에 귀신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은 장승이 귀신의 얼굴 모양인 것도 귀신에게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탐험 중인 1차 기행팀
박물관학습 시트지를 가지고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그리고 야외전시장을 탐험하며 즐거운 학습시간을 갖고 있다.
박물관을 탐험 중인 2차 기행팀
박물관을 탐험 중인 3차 기행팀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국보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가 약 25톤에 달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고선자지 3층 석탑 (국보 제38호)
통일신라사대에는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의 비호를 받아 전국도처에 사찰과 불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남천(황천)
모래내라고도 불리는 남천은 반월성을 돌아흐르는 천연의 방어시설이다. 남천(황천)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도화녀와 비형랑의 이야기가 있다. 도화녀와 죽은 진지왕 사이에 태어난 비형은 번번이 월성의 성벽을 날아 서쪽으로 황천 냇가 언덕으로 가서 도깨비 떼를 모아놓고 놀았다. 군졸들이 수풀 속에 숨어 몰래 엿보았더니 도깨비들은 한창 놀다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고, 비형 또한 궁중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군졸들의 보고를 들은 진평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도깨비 떼를 거느리고 논다던데 참말이냐?" 비형이 그렇다고 시인하자 왕은 그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네가 도깨비 떼를 부려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가 거느리는 도깨비 떼를 부려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다리를 만들었는데, 도깨비들이 만든 다리라 하여 귀신다리라 하였다.
반월성 (사적 제16호)
신라 파사왕 22년(101)에 쌓은 성으로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도성터이다.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는 성벽 아래로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시설이 되고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할 수 있는 문터와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흘러내리도록 인공적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즉 성벽 전체를 물이 돌아 흐르도록 해서 성을 보호했던 것이다.
석빙고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알음 창고이다. 신라는 오래 전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였으며,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북쪽 성루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데,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조선 영조 14년(1738) 이 석빙고를 축조하였다는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압지 (월지/사적 제18호)
삼국사기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기한 동물과 물고기를 길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연못이다. 1974년에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문무왕은 삼국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의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3개의 섬이 배치되었으며,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는 정교하고 도수로와 배수로의 시설도 교묘하다.
안압지의 야경 (1차 기행팀)
안압지의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의 금동여래삼존상과 금동보살상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당시의 것으로는 현존하는 예가 드문 목선, 그리고 건축 부재, 목간 등을 채취하여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3만여점의 유물은 경주국립박물관의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다.
능지탑
예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랜동안 돌무더기처럼 방치되어 왔던 것을 최근에 와서 최대한 옛 석재들을 찾아내어 옛 모습을 갖추어 놓았다. 말끔하게 축조된 능지탑에서 그나마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임종 후 10일 내에 장사를 치를 것과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를 지내면 호국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노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유언에 의하여 시신을 화장하기 위하여 능지탑을 이곳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며, 당초에는 이곳에 감실을 짓고 소조대불을 모시는 등 대단한 역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네모진탑과 기단석 사방의 12지신상 등으로 당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은 5층까지 쌓아올린 석탑으로 추정된다.
망덕사 터 (사적 제7호)
낭산에서 동남산이 건너다 보이는 논 가운데 섬처럼 자리하고 있는 망덕사는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절의 양식인 쌍탑식 가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 절의 끝은 급한 경사가 져 있는데, 그 남쪽으로는 남천이 흐른다. 절터에는 동서에 목조탑의 기단이 있고, 그 북쪽에 금당터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그 밖의 건물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로 주변에는 초석 또는 기단 석재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보물65호로 지정된 소박하고 웅장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문왕 5년에 창건되었으며, 이 당간지주도 그때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깃대(당간)을 세우기 위한 깃대 받침이다.
사진은 3차 기행 때 찍은 것으로
망덕사의 일출 장면이다.
부처바위 (보물 제201호)
사방불이 새겨진 탑이나 바위들은 우리나라에 많은데, 그중에 이 부처바위가 가장 크고 다양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높이 9m, 둘레 30m, 가량의 큰 바위에다 탑, 불상, 비천상, 승려상, 사자상 등 다양한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특히 북면에는 2기의 목탑과 석가여래, 연꽃, 사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2기의 마애탑은 신라목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서출지 (사적 제138호)
소지왕 10년에 왕에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을 하여 왕에게 고하기를 “이 까마귀의 가는 곳을 찾아 보라”고 하였다. 왕이 쫓아가게 하였는데, 동남산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 그만 까마귀의 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올렸는데, 겉봉에 “`이 편지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써 있었다.
왕이 “한 사람만 죽는 것이 옳다”하였지만, 천기를 보는 관원이 “두 사람은 일반 백성을 말하는 것이요,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편지를 떼어 보니 “거문고 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궐에 들어가 무사를 시켜 활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거기에는 궁궐의 내전에서 불공드리는 승려와 지체 높은 여인인 궁주가 서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왕은 두 사람을 처형시켰다. 그후 편지를 가진 노인이 나온 연못이라 하여 서출지라 하였다.
영지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백제의 가장 뛰어난 석공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 건축이 온 힘을 쏟으며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자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불국사로 향했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여인을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도 못하고 불국사 문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한 스님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지성으로 빌면 탑 공사가 끝나는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아사녀는 온 종일 연못을 들여다 보며 지성을 들였지만 탑의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움을 견디다 못한 아사녀는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영지석불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단숨에 영지 못으로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연못 주위를 돌던 아사달은 홀연히 바위에 그리운 아내의 모습을 닮은 부처를 새기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연못을 영지라고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은 석가탑은 무영탑이라고 불렀다.
괘릉 (사적 제26호)
삼국유사의 증언을 토대로 신라 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 능은 본래 이 곳에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수면상에 걸어 안장하였다고 하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봉분 밑둘레에 12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둘렀고, 주위에 수십 개의 돌기둥 난간과 봉분 앞에 석상이 있으며, 남쪽에는 돌사자 2쌍과 문?무인석 각 1쌍이 자리잡고 있다. 무인석의 머리 조각은 서구인을 닮은 것이 특이하며, 12지상의 활달한 조각 기술은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괘릉의 무인상
괘릉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무인석이다. 문인석은 우리 모습과 흡사한데, 무인석은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파마를 한듯한 턱수염 등은 흡사 아라비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기록들을 보면 당시 고대사회는 이미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사적 및 명승 제1호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작은 규모로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중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 2세부모>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청운교 백운요 (국보 제23호)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2호)
청운교 백운교의 33계단은 불교의 33천을 나타낸 것으로서 중생의 욕심이 완전히 끊어지기 이전에 천상의 바람을 상징한 것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극락세계에 도달한 불제자가 부처님 세계의 꽃인 연꽃과 팔보로 장식된 계단을 밟고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한다. 계단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관음전
비로전 동쪽 언덕위에 있는 관음전은 사각 모임지붕을 한 독특한 형태의 전각인데, 이곳은 천수보살(천개의 손을 가진 보살)이라고도 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무설전
무설전은 신라 문무왕 10년에 왕명으로 세워졌는데, 이것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건한 751년보다 백년이나 앞서 만들어 진 것이다. 당시 화엄경을 강의하던 강당이며, 의상대사가 최초로 설법을 행한 곳이다.
다보탑 (국보 제20호)
불국사 대웅전 앞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그 규모는 높이가 10.4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기단부는 사방에 계단이 있고 계단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있다. 그 위에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사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을 받치고 있다. 하층 기단 윗면에 4구의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우리나 라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이 탑은 뛰어난 석재가공 기술과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다.
이 탑의 1층은 억센 4각, 2층은 아담한 8각, 3층은 부드러운 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변화를 주면서 강한은 차츰 약하게 되고, 억센 힘은 부드러워진다. 이로써 안정과 성장을 꿈꾸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탑속에 담아냈다.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흙 주무르듯 잘 구슬리고 담듬어 낸 것이 다보탑의 솜씨라면, 석가탑의 솜씨는 커다른 통돌의 크기를 줄이면서 깔끔하게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석가탑 (국보 제21호)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탑은 높이가 8.2m나 되는 큰 탑으로 일명 <무영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 탑의 건립에 대한 전설과 관련된 것이다.
석가탑은 탑주에 연화무늬를 새긴 8개의 둥근 돌을 돌려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팔방금강좌이다. 팔방금강좌는 석가여래가 상주하는 석가탑에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탑의 구조는 2중 기단으로 상하층기단 중석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졌으며, 옥개석의 부드러운 곡선 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아래 부분은 낮고 널찍한데 비하여 윗 부분은 경쾌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기단의 높이와 탑신이 서로 상하에서 알맞게 조화되어 안정된 느낌과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준다. 석가탑은 우리에게 신라 석탑의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탑이다.
비로전 사리탑 (부도/보물 제61호)
비로전 앞 서쪽 전각 내부에 안치된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나 부도의 주인공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체 형태는 석등형으로 되어 있다.
부도의 구조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하대석은 안상이 새겨진 팔각대석 위에 연화판을 배치하였고, 장구형에 가까운 중대석은 구름 형상으로 모각 되어 있다.
배가 부른 원통형의 탑신석에는 얕은 감실을 조각하고 그 안에 여래좌상과 보살입상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반파된 옥개석은 기와지붕형으로 제작되었으며, 상부에는 낮은 6각형의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불국사 범영루 앞에서(2차 기행팀)
2차 기행 때의 경주는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위에 있는 불국사 전경도 2차 기행 때 찍은 것이고, 그 아래의 연화교 칠보교 사진은 2주 후에 있었던 3차 기행 때 찍은 것이다.
아무쪼록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아릅답게 자라나기를 기도한다.
구정동 방형분 (사적 제27호)
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은 장군총과 같이 방형으로 된 것이지만, 신라 것은 거의 원형토분인데, 이 고분은 신라에서는 유일한 방형분이다. 이 고분은 무덤 안의 석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고분의 앞쪽 중앙에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통로가 있다. 석실 안 바닥은 돌로 만들었으며, 입구 왼쪽 면에는 안상이 그려진 직사각형의 받침돌이 있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상이 조각된 호석이 있어,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으로 생각되나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고분은 길게 다듬은 큰돌을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로 판석을 넓게 놓아 봉토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았다. 각 면에는 무사 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을 새긴 돌을 놓고 양쪽 귀퉁이에 우주를 세웠다. 거창이나 진주 등에서 나타나는 네모무덤의 선구적인 형태로 보여진다.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형식이 무열왕릉보다 한층 발달한 이 능은 문무왕의 맏아들인 신문왕의 능이다.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의 맏아들로 재위 12년 동안 벼슬제도를 정비하고, 왕권 확립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학을 설치하여 신라전성시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능의 구조는 원형토분으로 봉토의 둘레 돌이 5단으로 되어 있으며 삼각형의 지탱석을 세워 튼튼히 하였다.
사천왕사 터 (사적 제8호)
문무왕 14년(674)에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자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다고 믿었다.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테봉토 밑에 둘레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으로 낭산의 정상에 자라잡고 있다. 둘레 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그 밖으로 드문드문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낭산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여 여왕이 죽은 후 거기에 장사지냈다. 여왕을 장사지낸 지 10여 년 후인 문무왕 때 능 밑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서 말한 바 사천왕 위가 도리천이라는 가르침을 실증한 것이 되어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고 한다.
여왕은 16년 동안 집권하면서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고, 첨성대,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경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 그 이후
내가 경주를 처음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던 1974년 가을이었고, 역사기행을 하기 위하여 답사명목으로 경주를 처음 찾은 것도 1991년 여름이었다. 그후로 몇 차례 답사여행을 하면서 경주와 친해졌는데, 경주는 한번 가서는 결코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역사를 간직한 도시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와 만났다. 이번에는 그 카이로스가 나의 삶을 미로와 같은 역사의 현장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현기를 잃은 것이다.
그날 이후 들릴듯 말듯 한 나의 숨결은 무언의 기도가 되었고, 아직도 흐르는 눈물은 이끼 낀 영혼을 닦아 내는 약속의 사슬이 되었다. 그런데 그 깊은 고통 속에서 주님을 부르는 나의 밤은 오히려 싱싱한 바다가 되어 다가왔고, 지울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 앞애 나를 세워주셨다. 현기와 함께 그날 이후 ...
역사기행을 마치고
가을의 경주는 아름답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천년의 고도 경주와 그가 간직한 유적과 유물, 그리고 그들이 자리한 장소는 가을과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나는 경주애서 아이들과 함께 당시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과 세계관을 나누었다. 명작은 보고 또 보아도 그리운 법. 나는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명작, 경주에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들꽃 하나도 소중하게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크고 부드러운 손길을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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