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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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아름다운 섬 제주도 역사기행 조회수 : 1579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6-05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JEJU / 제주

제주는 오랜 역사,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관광의 섬이다.
올해는 제주도로
4일간의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낮선 이국의 풍광 속에 펼쳐진
제주 특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찾아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 보는 것이
이번 제주 여행의 목적이다.
 

HUMAN / 인류

빌레못동굴

빌레못동굴은 해안에서 직선거리 4Km, 해발 200m 정도 되는 경사면에 위치한다. 1973년에 발굴된 유적지는 동굴 입구에서 약 900m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 당시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은 함몰되어 큰 돌로 막혔으며, 그 입구로 보이는 곳에서 많은 양의 숯이 발견되어 굴속의 생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2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진 유적에서는 긁개(25점), 돌칼(11점), 흠날(1점)을 비롯하여 모두 8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석기 제작 기술상 중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발자국 유적지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송악산 주변지역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인 신석기 후기에 바다 속에서 송악산이 폭발하여 화산재 퇴적층이 쌓여 넓은 갯벌 조간대가 형성되었다. 이때 주변에 살고 있던 신석기인들은 이곳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고 동물을 사냥했는데, 사슴, 말 발자국과 함께 찍혀 있는 사람의 발자국 흔적들은 이들이 남긴 발자국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발자국유적지는 문화제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발자국 화석지대는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울타리를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삼양동 선사 유적지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사람이 살던 곳으로 중심 시기는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확인된 집 자리만도 236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것은 삼양동식 토기인데, 제주 고유의 토기이다.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기원후 100년경 이 마을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불에 탄 흔적도 없이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로 폐허가 된 것이다. 아마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거나 강력한 용담동 세력에 의해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

공항고인돌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대부분 남방식이고, 숫자는 200기를 넘지 못하나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제주도 지석묘의 석재가 깨어지기 쉬운 현무암질이고, 지석묘의 위치가 대부분 후에 마을이 들어선 곳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훼손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고인돌의 윗부분에 있는 흔적은 성혈의 훈적인데, 다산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인돌시대 때에는 여성의 생식기도 신앙의 대상이었다.

고인돌의 치석흔적

공항고인돌에는 성혈과 치석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데, 성혈은 고대인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흔적이며, 돌을 쪼개기 위한 치석(사진에 있는 구멍)의 흔적은 고대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RESISTANCE / 저항

항몽유적지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 삼별초는 반몽고, 반개경정부의 세력을 결집하여 봉기하게 된다. 봉기직후 이들은 진도로 그 거점으로 옮겨서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여몽군을 압도하였지만, 1년여 만에 진도 정부가 무너지자 최후의 거점을 제주로 옮기고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항몽순의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쫓기던 삼별초의 지도자 김통정의 자결로 대몽항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후 몽고는 제주도를 거점으로 일본을 침공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래서 몽고는 이곳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의 자연조건에 맞추어 우마 양육의 목장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위의 사진은 삼별초의 대몽항쟁으로 목숨으로 잃은 분들을 기리는 순국기념비이다.

항파두리 외성

길이가 6km이며, 내외 2중으로 만들어 진 항파두리 성은 13세기의 고려 성곽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성은 방어성이 아니라 개경과 같은 도성으로 건설되었는데, 삼별초가 진도에 정부를 세웠을 때도 용장산성을 건설하여 도성으로 삼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웠었다. 당시 이 성안에는 관아와 군사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강화와 진도를 거쳐 온 관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삼별초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호국의 얼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 성은 13세기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보존되고 있다.

항파두리 외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2차 제주기행 팀원들

살맞은 돌

살 맞은 돌의 이야기는 삼별초와 관련이 깊다. 이 돌은 삼별초 군사들이 훈련할 때 과녁으로 사용했다는 바위인데, 커다란 현무암바위에 구멍이 몇 군데 뚫려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구멍 안에 화살이 남아 있어 엿을 바꿔먹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화살에 의해 패인 자국이 아니라 용암이 나무를 감싸고 급격히 굳으면서 나무가 타버리면서 형성된 구멍인 듯 하다.

환해장성

제주도의 해안선을 따라 약 120Km에 쌓여진 석성인데, 삼별초군이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대몽항쟁을 전개하자 고려정부는 삼별초군의 제주도 접근을 막고자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 후 삼별초에 의해서 제주도가 함락되자 삼별초군은 제주도에 항쟁의 거점을 마련한 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제주도 상륙을 차단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환해장성을 완공하였다. 이후 이 성은 조선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보수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알뜨르 비행장

소형비행기를 숨기기 위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해군 항공대의 비행장으로 설치된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는 현재 20여개의 격납고가 해안을 향해 남아 있다. 이 중에 2~3개는 약간 함몰되어 있으나, 거의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격납고는 소위 가미가제(神風)로 불리는 자폭용 비행기들을 공습에서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또한 '붉은 잠자리'라고 불리는 별명의 연습기에 폭탄을 실은 후 소년병들을 훈련시켜 내륙으로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 격납고는 널판으로 거푸집을 지은 후 시멘트를 덮고 널판을 떼어냈다고 하는데, 격납고의 천장에는 거푸집을 댔던 자국이 선명하다.

일도동굴

제주도 해안에서 인공동굴을 보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상일출봉 밑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송악산 바닷가에서는 더욱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결7호 작전(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제주도 방어작전)이 구체화 되면서 일본은 제주도의 해안에 수많은 동굴을 팠다. 해안 동굴 속에 어뢰를 장착한 소형보트를 숨겨두었다가 미군함대가 나타나면 그대로 돌진하여 자폭하였는데 이들을 가이텐(回天) 자살특공대라고 부른다. 송악산에는 15개의 인공동굴이 남아있기 때문에 일오동굴이라고 부른다.

조천 만세동산

제주의 만세운동은 3월 21일부터 전개 되었는데, 연일 수 백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일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규모도 규모이지만 이 운동을 통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많아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제주도 만세운동의 불씨를 가져온 사람은 당시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정환이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 김시범에게 <기미년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자 김시범은 14명의 동지와 함께 조천의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HISTORY / 역사

화북포구

화복포구는 조선시대 제주의 2대 포구(화북포구, 조천포구)의 하나로 제주읍성과 가장 가까운 포구였기에 그 중요성은 더 했다. 이곳을 통해서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 등의 유배객들이 제주에 들어왔다.

제주목사 김정의 공덕비

화북포구는 김정목사에 의해서 정비되었는데, 그는 포구를 정비하는 일에 손수 돌을 나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피로가 겹쳐 급사하였다. 포구에는 김정목사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화북 비석거리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비석에는 비문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다. 더 정성스레 비석을 세우는 경우에는 비석을 새긴 사람의 이름까지 새겨진다. 그 비문에 대한 책임감이자 자부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화북 비석거리에 있는 비석의 특징은 비석에 성씨가 뭉개져 있다는 것이다. 비석치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석치기는 민중이 보여준 최소한의 분노의 표시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석의 이름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성씨만 뭉개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보다 가문을 중요시 여기던 사회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연북정

조선시대에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들에게 있어서 중앙정계에 복귀하는 것은 간절한 꿈이었다. 그러니 목민은 뒷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런 촌구석을 벗어나 출세의 길을 걷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제주에 유배 온 유배객의 심정은 더 했다. 지방관들에 비해서 그들은 종신토록 이곳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북쪽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지는 다를지언정 제주에 온 양반들은 누구나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살았다. 연북정은 그들에게 희망의 등대였다.

추사적거지

제주도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와서 살던 곳이다. 이건의 제주풍토기를 보면 “탐라는 온 나라 죄인의 유형지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제주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하여 제주에 유배된 사람의 수는 무려 200여명이나 되는데 가장 고령자는 신임으로 84세였고, 최연소자는 소현세자의 3남인 석견으로 4세였다.

광해군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유배의 형벌을 제주도에서 감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정, 정온, 신명규, 김진구, 김춘택, 최익현 등이 있다. 이곳은 추사 김정희가 9년간의 제주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위리안치형

유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본향안치는 죄인을 낙향시켜 살게 하는 형벌이다. 중도부처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게 하는 형벌이다. 주군안치는 죄인의 활동범위를 비교적 넓게 허용해 준 것으로 유배지의 행정구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다산 정약용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그래서 다산은 유배지를 돌아다니며 민중들의 생활현실을 보았고, 그것이 <목민심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리안치는 생활하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한 형벌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그런 까닭에 추사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유배형의 차이로 인하여 다산은 사회현실을 보았고, 추사는 자신의 내면을 본 것이다. 절도안치는 섬에 가두어 살게 하는 형벌이다.

대정행교

향교는 관립교육기관으로 지방 수령이 파견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씩 설치하였다. 대정향교는 태종 때 대정현에 설치하였던 것을 효종 때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350년 전이다. 추사가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 자주 갔던 곳이 대정향교인데, 대학자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향교 나들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향교 동재(기숙사)의 현판으로 써준 <의문당(疑問堂)>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세한도의 모델이 된 소나무로도 유명하다.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의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며, 서기 1448년(세종 30년) 제주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상무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정자 정면의 제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또한 대들보의 벽화가 유명한데 작자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 초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계 집으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15자 정도나 나왔던 처마를 2자 이상 잘라 버렸다.

제주목 관아터

제주시의 관덕정 일대는 과거 탐라국 시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제주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 군사의 중심지로서의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말의 혼란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고, 관덕정만 남았으나 <탐라 순력도>와 <홍화각기> 등의 문헌과 자료를 기초로 최근에 복원되었다.

제주목 관아지의 복원은 제주 역사의 중심을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 등의 궁궐에 비하면 웅장한 멋은 없지만 제주의 옛 모습과 건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과 함께 건물별 특징을 알 수 있는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증주벽립

증주벽립이란 매애비는 오현단 위쪽에 새겨진 글씨인데,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하여 다시 새긴 것이다.`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현단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인들을 크게 교화한 인물로 평가 받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동계 정온,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의 오현을 추앙하여 모셔놓은 사당인데, 숙종 때 귤림서원이라 하여 처음 세운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된 후,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다시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 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조두석이 서 있다.

하멜상선 박물관

제주도에 표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었는데, 사신들을 통하여 송환되었다. 일본인들도 표착한 예가 많이 있다.

최초로 서양인이 표착한 것은 네델란드인 벨테브레인데, 그는 나중에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후에 하멜일행이 제주에 표착하였을 때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사진은 용머리 해안에 설치된 하멜표류 기념박물관의 모습이다.

하멜기념비

하멜 일행은 조선 효종4년(1653년)에 표착하였는데,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전라좌수영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중 동료 7명과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에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동인도회사에 그 기간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일종의 하멜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이다.

백조일손 학살터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일제가 버리고 간 탄약고 터에서 193명의 양민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좌익분자를 사전에 격리,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예비 검속'은 무고한 양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날 새벽 2시에 처형된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새벽 5시에 처형된 132명의 시신은 당국의 방해로 6년 8개월 만인 1957년에야 비소로 수습되어 묻혔는데, 그 묘지가 백조일손 묘지이다

MILLITARY / 군사

제주읍성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그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 후 조선의 태종 때 제주읍성을 보수하였고,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뤄졌다. 이후에도 성안에 물이 없고, 가락천과 산저천(산짓물)의 범람으로 인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뤄졌다. 이후 1780년(정조 4)에는 제주목사 김영수가 산저천의 범람으로 인가가 잠겨 부서지자 예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步) 높이 9척인 간성(間城)을 쌓아 그 폐해를 막기도 하였다. 현재는 오현단 남쪽에 성의 일부가 복원돼 있을 뿐이다.

대정현성

이 읍성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는 달리 집과 밭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지금은 성벽 안에서 군데군데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은 동·서·남문 3개만 설치되고 북문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들이 있었으며, 이 지역 방어를 위하여 10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먼 곳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정의현성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는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3현으로 나뉘어졌을 때 정의현 현청이 있던 마을로 제주도 동부 산간지대 마을의 특성이 잘 남아 있다. 유형, 무형의 많은 문화유산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어 있어 중요민속자료 제 188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이곳에는 돌과 진흙, 초가지붕으로 된 3백여 채의 민가를 비롯하여 향교, 정의현청이였던 일관헌, 돌하르방, 성터, 연자매, 옛 관공서 터, 옛 비석 등이 있다.

조천진

조천은 화북포구와 함께 제주의 2대 포구 중 하나로서 오래전 관이 설치 될 정도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던 곳이다. 부임하던 지방관이나 유배객들이 주로 이 표구를 이용하였다. 불로초를 구하러 나선 진시황의 사자가 도착했다는 금당지도 이곳이라는 설이 있다.

제주의 방어시설은 3성(제주읍성, 대정현성, 정의현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될 수 있다.

애월연대

봉수는 먼 거리를 조망하면서 횃불과 연기로 긴급 상황을 알리는 통신시설이다. 그러므로 봉수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오름에 위치하게 된다. 형태는 주로 둥글게 되어 있다. 제주에는 25의 봉수가 있었다.

연대는 가까운 해안지역의 현장을 살피면서 횃불과 연기로 긴급 상황을 알리는 통신시설이다. 연대는 직육면체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제주에는 38개의 연대가 있었다.

NATURE / 자연

한라산

제주도 중앙에 자리 잡은 한라산은 그 줄기가 동서로 뻗어 있으며 남쪽은 급한 반면 북쪽은 완만하고, 동서는 다소 높으면서 평탄하고 광활하다. 한라산은 지질학상 신생대 제4기에 화산분출로 생성된 휴화산으로 대부분 현무암으로 덮여 있는데 산마루에는 분화구였던 백록담이 있으며 고산식물의 보고로서 식물의 종류도 무려 1,800여 종이나 되어 울창한 자연림과 더불어 광대한 초원이 장관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높은 절벽과 깎아지른 듯한 비탈, 그리고 얕은 계곡의 기암괴석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이 산의 명물로 꼽히는 진달래 군락이 또한 아름답다. 그밖에 가을의 단풍은 빼놓을 수 없는 경관이며, 눈 속에 잠긴 설경의 한라는 절경 중의 절경으로 꼽힌다.

성산 일출봉

성산일출봉은 수중분화활동의 결과로서 생겨난 기생화산의 분화구로 높이 182m에 정상은 3만 여 평의 초지와 왕관 같은 99개의 작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남쪽과 북쪽의 외벽은 바닷물에 의해 빙벽(氷壁)같이 날카롭게 깎아 내린 절벽이고, 서북면 만이 유연한 잔디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산일출봉의 육계사주

성산일출봉과 성산읍은 육계사주로 연결되어 있는데, 육계사주란 연안류나 모래가 파도에 운반되어 파도의 힘이 적어 진 곳에서 퇴적하여 형성된 지형이다. 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돋이 광경은 참으로 장엄하다.

산굼부리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화산의 화구인 산굼부리는 제주의 360여개 기생화산이 용암과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임에 반하여, 화산폭발로 암석을 날려버려 평평한 지면에 움푹 꺼져 들어간 '구멍화산'이다. 이를 폭렬공 기생화산(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어 뻥 뚫린 분화구)이라 하며 봉우리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백록담. 일출봉. 송악산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인 분화구의 하나인 산굼부리 분화구는 아무리 비가와도 화구 안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섭지코지

코지는 곶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곳은 제주의 다른 해안과는 달리 ‘송이’라는 붉은 화산재로 되어있고, 해수면의 높이에 따라 물 속에 잠겼다가 일어서는 기암괴석은 수석 전시회를 방불케 할 정도다. 붉은 화산재로 형성된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용왕의 아들이 선녀에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상황제의 노여움을 받고 돌이 됐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촛대 모양의 바위(선돌)이 바닷가에 외로이 서 있다. 섭지코지의 정상에는 왜적의 침입 때 봉화 불을 피워 마을의 위급함을 알렸다는 연대가 자라잡고 있다.

송악산과 해안절벽

제주의 남쪽 끝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송악산은 높이가 104m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제주의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벼랑 끝에 서면 시원스레 탁 트인 바다 넘어 마라도와 가파도가 손에 잡힐 뜻이 둥실 떠있고, 서쪽으로는 옥항상제가 한라산의 봉우리를 뽑아 던졌다는 수려한 산방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른 기운이 가득한 초지위에는 염소 떼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너무나 평화로운 이 산은 일제의 가장 치열한 수탈의 현장이었다.

용머리해안

해안의 언덕 모양이 마치 용이 머리를 틀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과 닮아 용머리라 이름 한 이곳은 자연에 대한 경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지대다.

용머리해안

수 천 만년 동안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 중 하나이다. 해안 절벽을 모진 파도가 때려서 만들어 놓은 오묘한 해안 절경을 보는 순간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산방산

산방산은 제주도 형성시기에 생성 되었으며 높이는 395m이다. 원래 한라산 정상이었는데 뽑혀서 산방산이 되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사실인 양 산방산은 제주의 다른 산과는 달리 분화구가 없으며, 외벽은 온통 풍화작용에 의한 침식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산방굴사

온통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방산 중턱에 영주 10경의 하나인 산방굴사가 있다. 유배객 추사는 가끔 이곳에 올라 답답한 심사를 달랬다고 하는데, 굴밖에 있는 노송사이로 보이는 형제섬, 가파도, 한국 최남단 영토인 마라도와 용머리 해안의 경관이 아름답다.

주상절리

주상절리란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나타나는 다각형(보통은 4~6각형)의 암석인데, 용암이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작용의 결과로서 만들어진다. 이곳의 주상절리대는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형성되는 기둥모양의 평행한 절리로서 고온의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는 과정에서 수축작용에 의해 생겨난 갈라진 틈으로 육각형의 모양의 돌기둥인데, 그 모양이 너무나 선명해 마치 바다위에 떠 있는 벌집을 보는 듯 하다.

만장굴

만장굴은 제주의 대표적 용암동굴로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화산 폭발시에 용암이 물처럼 녹아내리며 굴을 형성한 것을 용암굴이라 하는데, 이 동굴은 길이가 13,422m로서 용암동굴 종류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것으로 공인되고 있다. 굴 내부는 연중 11∼21℃를 유지하여 항상 쾌적할 뿐만 아니라 희귀한 생물이 서식하여 학술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용암분출로 형성된 돌거북, 돌기둥, 날개벽 등의 형상이 관광객들이 경탄을 자아내는 장소이다.

우도의 서빈백사

누워 있는 소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우도라고 이름 붙여진 이 섬에 사람이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헌종9년 1843년경이라고 짐작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곳에 사람이 왕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우도에 들어가서 땅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우도에서 방목하던 마필을 다른 목장으로 옮긴 이후인 헌종 9년(1843년) 경부터라고 생각된다.

사진은 우도의 산호해수역장인 서빈백사인데, 우도의 서쪽 끝 해안에 형성된 산호 모래사장으로 제주도의 3대 보존자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호는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란다고 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동안경굴

동쪽 해안의 고래굴이라는 뜻이다. 우도봉 뒷마을의 '검멀레' 해변에 '콧구멍'이라는 2개의 해식동굴이 있는데, 이굴에는 예전에 거인고래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중 동굴로 되어있는 이 굴은 썰물이 되어야만 입구를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처음에 나타나는 굴은 작지만 다음에 나타나는 두 번째 굴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크고 웅장하다.

이 동굴에서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동굴음악회가 열린다.

비자림

이곳에는 300~800년생 비자나무 2,570그루가 밀집하여 군락을 이룬다. 나무의 높이는 7~14m,직경은 50~110㎝, 수관폭은 10~15m에 이르고 있어 단순림으로는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숲 속 중앙에는 제주에서 최고령목이라는 8백년 이상 된 비자나무가 있다.

비자림 산책

옛부터 섬의 진상품으로 바쳤던 비자나무의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고, 음식이나 제사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지방분이 있어 비자유를 짜기도 하는데 기관지 천식이나 장 기능 회복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1차 제주기행팀이 수백년 묵은 비자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다.

천재연폭포

천지연폭포, 정방폭포와 함께 제주 3대 폭포의 하나. 옥황상제를 모시는 7선녀가 한밤중이면 내려와 목욕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제연폭포는 울창한 수림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제주도의 다른 폭포와 다른 점이다. 선임교 앞에 서 있는 천제루라는 커다란 이층 누각의 오른쪽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이곳의 전망대가 천제연폭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중문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며, 맑은 날이면 한라산이 깨끗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정방폭포

정방폭포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높이 23m의 두 줄기 폭포이다. 23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하얀 비단을 흘러 드리운 것 같다하여 영주10경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중국 진나라 때 시황제의 사자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500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폭포의 석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란 네 글자를 새기고, 서쪽으로 갔다고 하는데서 서귀(西歸)포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앞 바다의 숲섬, 문섬, 새섬 범섬은 난대림 숲이 우거져 남국의 정취를 돋우어 준다.

곽지 과물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오는 섬이지만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쓸 물은 많지 않기 때문에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와 빗물에 식수를 의존하며, 이를 지혜롭게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붕 위에서 처마를 통해 물을 흘러내리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참 통`이라 하여 나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나무 줄기둘레에 띠를 둘러 항아리로 받기도 하였다.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우물(과물)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는데 곽지해수욕장에 남아있는 `과물`이 좋은 예이다.

한림공원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림공원은 아열대 식물원, 민속마을, 수석전시관, 분재원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현재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어린이 놀이동산, 야외 휴양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한림공원의 제주석분재원

공원의 야외전시장 중에 수석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용암수형이다.

제주도는 신생대 제4기의 화산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화산섬으로서 신선한 화산암류가 섬 곳곳에 분포되어 있어 ‘돌의 섬’이라고 불리운다. 화산암은 대부분이 현무암이며 약간의 조면암도 있다. 용암수형, 화산탄은 과거에 있었던 폭발적인 화산활동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협제굴

길이 393m의 용암동굴로서 좌우 양쪽으로 발달하였다. 북서 방향의 오른쪽 굴은 내부에서 양분되며, 150m 내부에서 패사(조개가루모래)로 막혔으나, 그 너머 40여m 지점에 다른 하나의 입구가 있어 내부로 60m 가량의 동굴이 발달해 있다. 제2입구와 협재굴 종단부와는 55m 가량 떨어져 있어 두 굴은 원래 동일한 굴로 함몰되어 분리된 것으로 추측된다.

용암동굴은 용암류의 표면이 냉각 응고할 때 내부의 가스나 녹은 용암이 밖으로 빠져나간 자리에 터널 모양의 공동이 형성된 것이다.

도깨비도로

신비의 도로` 또는 `도깨비도로`라고 불리는 이 도로는 내리막길인데도 차가 거꾸로 올라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 산록도로와 제2횡단도로의 어리목 가는 길의 두 군데 있는 이 도로는 실제로는 경사도가 낮은 곳이 시각적으로 높게 보이는 100m 정도의 착시 구간 때문에 신비함을 맛볼 수 있다.

이번 여행기간 동안에는 비가 많이 와서 도깨비도로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사람이 눈이 가지는 한계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면 낭패를 보는 일이 많을 것이다.

제주 목석원

제주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된 목석원은 제주도산 자연석과 고사목 뿌리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20점의 천연 형상목을 포함하여 1,000여 점의 예술적인 목물과 사람의 머리 형태를 한 500여 점의 석물, 100여 점의 수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제주의 나무와 돌을 가지고 갑돌이의 일생을 주세로 사람의 한 평생을 꾸며놓은 전시장이다.

산천재의 곰솔

예로부터 제주에서는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가는 길이 험하고 날씨가 나쁠 때에는 이 곰솔이 있는 산천단에서 제사를 올렸다 한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 있는 천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는 큰 나무에서 잠시 쉬어 내려온다고 믿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곰솔도 천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하강통로에 있는 나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신성시 여겨 오랫동안 잘 보호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곰솔이다.

성읍리 느티나무

성읍거리의 관아 앞에서 자라는 느티나무는 높이 20.5m, 가슴높이의 둘레 4.30m로서 수령을 약 10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읍리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성읍관아 앞에는 느티나무 뿐만 아니라 길가와 서낭당 둘레에서 7그루의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3.5m, 가슴높이의 둘레가 4.5m이다. 팽나무와 더불어 생달나무가 5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그 중의 두 그루는 당나무로 되어 있다. 밑 부분의 둘레가 4.6m로서 팽나무와 붙어서 3개로 갈라져 있다.

MYTH / 신화

삼성혈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곳이다. 삼성혈은 지상에 파인 세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구멍은 品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전해지며 나머지 구멍은 둘레가 각각 3자인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주변의 나무는 구멍에서 나오는 따뜻한 열기와 습기 때문에 모두 구멍을 향하여 고개를 숙인 형태로 자라고 있어서 더욱 신비롭다. 과학의 원리를 모르던 옛날 사람들은 더욱 신비감을 가졌을 것이다.

연혼포

연혼포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벽랑국의 3공주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탐라사회는 3공주를 맞이한 사건을 계기로 질적으로 변화한다. 3공주가 가져온 5곡과 가축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당시 세공주가 나무 상자에 모셔진 채 발견된 곳이라하여 '괘성개'라고 하며, 도착한 해안을 '황루알(황노알)'이라고 한다.

혼인지

세 을나(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수렵과 어로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보니 동쪽 바다위에서 오색찬란한 나무 상자가 내려와 해안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3신인이 내려가 열어보니 그곳에 알 모양의 둥근 옥합이 있고, 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자가 나와서 옥합을 열었는데, 옥합 속에서 푸른 옷을 입은 세공주와 우마와 오곡의 종자가 있었다고 한다.

혼인지는 고, 양, 부 3신인이 벽랑국의 3공주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목욕을 재계했다는 연못이다.

신방굴

혼인지에서 동쪽으로 50m 쯤 가면 조그마한 용암동굴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삼 신인이 신방을 차린 동굴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동굴은 선사시대인 들이 살던 동굴로 추정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동굴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어 삼 신인이 신방을 차렸다는 신화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환경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 같다.

답(하르방)

답(탑)은 솟대나 장승에 해당하는 신앙물로 마을의 경계나 기가 허한 곳에 원통형의 돌탑을 쌓아 마을의 평안을 비는 방사의 풍습의 하나이다. 약 50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 전역에서 이러한 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답(까마귀)

돌무더기 속에는 무쇠 솥과 밥주걱을 넣는 것이 보편적이다. 무쇠 솥은 어떤 불에도 견딘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고, 밥주걱은 부를 긁어모은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꼭대기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새 모양의 돌을 얹거나 돌하르방을 얹는 경우도 있다.

돌하르방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돌하르방은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큰 눈에 자루병 같은 코를 가졌으며, 입술을 다문 얼굴에 감투를 썼고, 두 손을 배에 나란히 모으고 서 있다.

이 돌하르방은 제주 컨벤션센터 앞 사거리에 세워진 것인데, 현대적인 감각으로 조각되었다.

정의현 읍성의 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읍성 주위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고 주변 마을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돌하르방은 주로 읍성 수호신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주술적 ·금표적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육지의 장승과 그 기능이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연

용왕의 사자(용)가 드나드는 연못이라 하여 용연이다. 용은 비를 몰고 오는 영물인지라 이곳에서 기우제를 드리기도 했다. 용연 주변의 상록수 숲과 7~8m의 병풍 기암은 용연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이런 절경 때문에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밤중에 배를 띄우고 주연을 베풀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술에 취한 조선의 양반들로부터 물놀이를 즐기던 어린아이까지 들락거리던 연못은 이제 제주시의 생활하수가 흘러드는 하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용연과 그 주변의 상록수림이 잘 보존되었으면 한다.

용두암

용두암은 이름 그대로 용이 포효하며 바다에서 막 솟구쳐 오르는 형상이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거친 날이면 금세 꿈틀거리는 용이 하늘을 향해 오르는 듯하다. 바닷가에 높이가 10m나 되고 바다 속에 잠긴 몸의 길이가 30M 쯤 되는 용두암을 응시하고 있으면 정말로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바위는 화산용암이 바닷가에 이르러 갑자기 식은 후 해식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용두암에서

용궁에 살던 용 한마리가 하늘로 승천하고자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가지면 승천할 수 있다는 것을 안 용은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몰래훔쳐 용연계곡을 통해 무사히 몸을 숨겨 내려 왔으나 용연이 끝나는 바닷가에서 승천하려다 들키고 말았다. 하늘을 날다 한라산 신령의 활을 맞고 바다에 떨어진 용은 승천하지 못한 한과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 형상으로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용두암 앞에서 여행을 마무리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믿음과 실력의 날개를 확짝 펼치고 꿈을 향해 마음껏 날아오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MUSEUM / 박물관

국립 제주박물관

제주는 한반도 남단의 가장 큰 섬으로서 선사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서 깊은 역사와 독특한 전통문화가 이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을 잇는 동북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의 한 축이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이렇게 형성된 제주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의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제주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여러 지역에서 수집해 온 역사적 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갖도록 구성되어 있다.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도 민속자연사 박물관은 제주도 내에 산재해 있는 고유의 민속유물과 자연사적 자료를 조사 연구,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전시실에는 제주인의 일상통과의례를 비롯하여 의, 식, 주와 생산 산업의 자료를 입체적으로 전시하는 한편 제주도의 형성과정, 지질양식, 해양생물, 동물, 식물의 자료를 생태학적으로 전시하여 제주의 자연과 인문 문화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 항일가념관

제주도에서 맨 처음으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온 곳으로 만세동산이라 부르고 있다. 조천, 신촌, 함덕리 주민 500~600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구호를 외쳐 도내 곳곳에 퍼졌던 것이다. 이곳에 후세들에게 민족독립과 자주정신을 길러주기 위하여 항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아프리카박물관

활짝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의 제주를 찾는 국내외의 많은 관람객들에게 아프리카문화를 보다 폭넓게 알리기 위하여 제주로 이전하여 새롭게 선보인 아프리카박물관의 외관은 서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젠네에 위치하고 있는 젠네대사원(이슬람사원)을 토대로 설계하였으며, 이는 아프리카 대륙의 정통성을 지키고 그들의 문화를 가능한 한 가깝게 전하기를 원하는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아프리카 박물관의 전통공연

아프리카 박물관에서는 매일 아프리카의 전토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연이 열려서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다.

테디베어박물관

테디 베어란 이름은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테어도어 루스벨트의 애칭인 테디에서 나온 말이다. 사냥에서 곰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대통령에게 보좌관들이 새끼 곰을 산 채로 잡아다 사냥한 것처럼 총을 쏘라고 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이를 소재로 테디 베어를 만들게 된 것이다.

테디베어박물관

테디 베어를 상품화한 사람은 미국의 모리스 미첨과 독일의 마가레테 슈타이프인데, 슈타이프사는 현재 세계 최고의 봉제 인형 제조회사가 되었다. 제주 테디 베어 뮤지엄에는 슈타이프사가 제작해 온 전설적인 테디 베어들도 만날 수 있다.

신영 영화박물관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은 울창한 아열대자연림과 해안절경이 접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맑은 공기로 그 지역자체가 휴식공간으로 제주도의 최남단인 남원읍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면적은 총 3만여평으로 연면적 800평규모의 지상2층과 지하1층으로 꾸며져 있다.

특히 해안선을 따라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야외산책로를 배경으로 한 박물관의 전경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박물관 건물은 제9회 아시아건축사대회에서 ARCASIA(아카시아) 건축 상을 수상한 우수 건축물로 설계되었다.

신영 영화박물관

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설치된 <영화 죠스>의 상징물인 식인상어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

미니미니랜드

건물과 인간을 일정 비율로 정밀하게 축소, 전시해 놓은 미니어처 테마파크는 오늘날 관광 자원적 측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원조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멋진 조형물이기도 하지만 시대상에 맞는 인물들을 배치시켜 입체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고,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해 놓은 것이어서 교육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마치 소인국에 온 걸리버처럼 건물과 인간을 한 눈에 굽어 내려다 볼 수 있는 미니어처 테마파크는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제주 컨벤션센터

제1997년에 설립된 ICC JEJU는 그동안 UNEP(유엔환경계획) 특별총회, PATA(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 연차총회, ADB(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 등의 대규모 국제회의와 국내 학술총회 등 500여건의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앞으로 아시아태평양 동맥경화학회 총회, IEEE 국제전력전자 학술가회의, 아시아 실험동물학회 총회 등의 회의를 통해 특별자치도 제주를 희망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힘찬 노를 저어가고 있다.

여행을 마치며

<여행의 양은 인생의 양>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많은 여행을 하였다. 새로운 곳을 찾기도 하여 한번 다녀온 땅을 다시 밟기도 하였다. 내가 밟은 땅이 새로운 곳이든, 아니면 다시 밟는 장소이든, 나에게 그 땅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나의 삶을 교훈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올 해는 제주도를 다녀왔다. 1983년, 설레임으로 제주를 처음 밟은 후 20년도 넘는 세월동안 수도 없이 다녀온 곳이 제주지만, 나에게 제주는 하늘과 땅 사람, 기후, 문화, 그리고 신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롭다. 나와 함께 여행의 양을 채워가는 아이들의 삶이나 환경, 그리고 생각과 태도가 어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여도 그들의 발걸음은 날매다 새로운 아침에 서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거룩한 영의 도우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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