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개방과 혼란의시대 근대사 역사기행 | 조회수 : 2836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5-10-10 |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탑골공원
서적 제354호
종로3가
만탑공원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만 5,720㎡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가,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다가, 1897년(광무 1)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발화지로 더욱 유서 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광장으로 공개되어 있는데, 특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손병희 선생의 동상
1919년 3월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의 선언문인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임의 대표
민족대표 33인 명단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 린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한용운 백용성
탑골공원에는
3·1만세운동의 진행과정이 새겨진 동판이 전시되어 있다.
황성기독회관
종로2가 YMCA건물
초기 YMCA는 태화관을 사용하였다가 점차 회원이 증가하자 회관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미국의 대부호인 워너메이커의 기부금으로 이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영국식 3층 양옥으로 건축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회관이 건축되매 마치 산과 같았다”고 하였다. 황성기독청년회는 독립협회 이래로 개화 개혁운동의 지도자 다수를 배출하였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계몽자강운동의 근거지였다.
미국 백화점의 왕인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과 전 세계에 YMCA 건물을 수없이 지어주었는데,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YMCA 벽돌건물도 워너메이커의 기증으로 지어졌다. 워너메이커가 평생에 지녔던 표어는 세 개의 T였다. "Thinking, Trying, and Trusting in God"
태화관
이곳은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당시에는 이 건물이 요리집 명월관의 분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요리집 명월관은 한말 궁중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 1909년 지은 것으로 1918년 건물이 소실되자 지금의 자리에 분점격인 태화관을 차렸다.
이 집에서는 한 때 이완용이 살기도하였는데 을사5적 가운데 하나인 이완용의 거처와 독립서언식의 장소라는 참으로 역사의 이이러니가 교차하는 장소이다. 3.1운동 후에는 감리교회에서 구입하여 태화 여자관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 회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고종황제 즉위 40년 칭경비
사적 제171호
광화문 교보빌딩 앞
대한제국의 황제를 위하여 “고종즉위 40년 칭경비”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연호를 ‘광무’라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한 것을 기념하고, 즉위 40돌과 아울러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띠고 있고, 비 맨 위의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인데 “대한제국이황제 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송”이라고 새겼다.
프랑스 빠리의
노틀담성당 앞에 설치된 도로원표
광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연세대학교 구내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알렌이 서울 재동에 설립한 왕립병원이다. 알렌은 1884년 9월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원 설립을 건의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광혜원은 개원 12일 만인 3월 12일 제중원으로 바뀐 후 제중원을 찾는 환자 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 활동에 종사하였다.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의 집(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알렌과 엘러스에게 벼슬을 내렸다.
최초로 광혜원이 세워졌던 재동의 홍영식의 집터에 설치된 표시석이다.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상에 있던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강의 조운을 통하여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을 저장하였다가 재분배하는 곳이었다. 또 한양의 천연방어선을 이루는 요지였으므로 이곳에 진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초기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고, 개화의 선각자 김옥균의 시신을 효수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에 선교사 묘지가 조성된 것은 제중원 원장이었던 헤론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헤론의 죽음으로 인해 외국인 묘지를 선정하는 문제가 생기자 선교사들은 그의 시신을 선교회 구내에 매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4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전통 때문에 한국인 교사와 조사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이 무렵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조선 정부에서 서울에서 약 8km 떨어진 양화진 지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곳에 외국인 묘지가 조성된 것이다.
메리 스크랜튼의 묘비
존 헤론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로 활동하였다.
헨리 게하드 아펜셀러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창설하고,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메리 스크랜튼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과 선교에 앞장섰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YMCA를 조직하고, 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으며, 언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셔우드 홀
<크리스마스 씰>의 창시자로서 폐결핵 퇴치운동에 앞장섰으며, 모범 농장을 만들어 영농기술을 보급하다가 일제에 의해서 추방당했다.
호머 헐버트 묘
헐버트는 왕실영어교사로 활동하면서 1907년에는 이준 열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이곳이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움과 동시에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한 데서 연유한다.
고종 3년(1866년) 천주교에 대하여 모진 박해가 가해져 9명의 신부가 순교하고,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신부의 고발로 텐진에 주둔한 극동함대사령관 로즈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한강으로 올라왔다. 프랑스 함대는 24시간 양화진에 정박하여 측량도 하고 주위의 반응을 살피는 행동을 하였으나 조선 군대는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이때 대원군은 "오랑캐가 머물러 있던 자리를 깨끗이 씻어야 할텐데 그것을 한강 물로 씻기는 물이 너무 아깝다. 차라리 그 자리는 오랑캐를 끌어드린 천주교도의 피로 씻으리라"하면서 양화진(새남터)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대원군 척화비
척화비 비문에 쓰인 말은 다음과 같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 비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므로,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1860년대를 필두로 하여 밀려온 열강들의 통상 요구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었으며, 더구나 봉건적 전제체제에 익숙한 조선왕조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라는 대혼란을 겪은 결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더욱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는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더 쇄국양이정책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아 과정에서 외세를 등에 엎은 세력이라고 여겨진 천주교는 무서운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천주교 순교자를 위한 절두산 기념교회
조선총독부 터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
1905년 을사조약을 발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을 주재시켜 이른바 보호정치를 시행하다가 1910년에는 그나마 명목만의 대한제국의 국가체제를 강제로 해체하고, 국권피탈을 단행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영토를 조선이라 개칭하였으며,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이보다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기능이 가동되었으며, 초대 총독에 앞서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취임하였다.
지금은 식민지의 전재인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경복궁의 본래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근정문 일곽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군국기무처
경복궁 수정전
수정전은 경회루 남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자칫하면 경복궁 관람에서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쉬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창으로 된 개방형으로 내부는 칸막이 하나 없이 탁 트인 넓은 구조를 하고 있다.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하던 이곳에서 한글이 창제되었고, 수많은 서적들이 저술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에는 주변에 약 200칸의 행각과 전각이 있었는데, 1910년 이후 일본인에 의해 모두 헐렸다. 일제는 이곳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활용하였다.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던
경복궁 수정전 앞 계단에서
옥호루
경복궁내의 을미사변 현장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정계에서는 반일세력이 증가하였고,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공사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자객들이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지금은 옥호루 일대가 복원공사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공업전습소
사적 제 297호
방송통신대학 정문 옆
공업전습소는 근대 공업교육기관으로 1907년에 토목·목공·응용화학·금공·염직·도기 등의 분야가 있었으며, 본과 2년과 전공과 1년의 교육과정으로 편제되었다. 근대적 공장을 세우는데 필요한 기술 인력을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이다.
1912년 4월 이후에는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로 개편되었다가 1916년 전습소가 경성공업전문학교와 경성공업학교로 분리되면서 본관 건물은 중앙시험소가 쓰게 되었다.
8·15광복 후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얼마 남지 않은 한말의 건물 가운데 목조건물로서는 유일하다.
경성제국대학
사적 제278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일제에 의하여 1924년에 설립된 이 학교에 조선 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대한의원
서울대학병원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다. 1899년 4월 최초로 국립병원으로서 내부병원이 설치되고, 광제원으로 바뀌었다가 대한의원으로 개칭되었다. 서양의학에 의한 의료와 교육을 목적으로 치료부·위생부·교육부의 3부를 두었다. 원장은 내부대신이 겸하였고, 의관 약제사 교관 사무원 기사 통역관 등을 두었으나 그 해 12월 거의 일본인으로 바뀌고 지석영·이규준 등 몇 명만 참여하였다.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서울대학 병원의 모습
청계천
서울 4대문 안의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서울시내의 북악과 인왕 남산 등 여러 골짜기의 모든 물이 모여져서 중랑포로 빠져나가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내인데, 옛 문헌에 이 하천은 서울 하수도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역수하는 물이므로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수가 된다고 하였다. 1957년에 복개되었던 이 하천은 2005년에 복원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청계천의 야경
운현궁
사적 제257호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왕세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이 되는 경우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며, 흥선 대원군의 사저이고,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궁의 일부에 덕성여대와 전 TBC방송국이 들어서고 헐려나가서,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이 없어지고, 사랑채 노안당, 안채 이로당과 노락당만이 남아 있다. 정원 등은 잘 보존되어 내정에는 고종이 소년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이 남아 있다.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이었으며 고종 즉위 후에 대원군의 섭정기간 동안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이곳의 영화루라는 누마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이로당
운현궁의 안채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축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던 곳이다.
한성사범
초등교육 발상 기념비
서울 교동초등학교
1895년 초등교육 기관인 소학교를 널리 보급할 목적에서 교육을 시킬 인재를 양성하려고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로서, 수업연한 2년의 본과와 6개월의 속성과를 둔 한성사범학교를 교동에 설치하였으며, 부속소학교도 설치하였다.
입학자격은 본과가 20~25세에 정원10명, 속성과가 22~35세에 정원 60명이었으며 무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과목은 수신, 교육, 국문, 한문, 역사, 지리, 수학, 물리, 화학, 박물, 습자, 체조 등이었는데 실제 교육과정에서 한학에 힘쓰고 다른 과목은 소홀히 하였으며, 학교운영도 부실하여 점차 유명무실해지다가, 국권피탈 후인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의 사범과 또는 교원 속성과로 개편되었다.
오늘날의 교동초등학교
빅영효 집터
인사동 경인미술관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1882년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 등과 함께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국기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이다.
박영효는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 발행을 준비하였으며, 그의 집은 언제나 개화당 사람들의 주된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본인은 망명객 신세가 되고, 큰형은 청군에게 살해당하고, 아버지는 자결하였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역적의 집안이 되었다.
190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 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고,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박영효의 집 터는 미술관과
찾집으로 개조되었다.
천도교 중앙교회당
운현궁 건너편 인사동 방향
당시 조선은 어린 헌종의 즉위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지배층의 다툼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들은 백성들에 대한 착취를 자행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였고, 새로 들어온 서학(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수도하던 중 ‘동학’이라는 대도를 깨닫게 되었다. 즉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우리나라만의 종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최제우가 만든 게 동학이다. 그리고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천도교 중앙교회당 정문 옆
한국은 세계 최초로 어린이운동을 시작한 어린이운동의 효시 국가이다. 손병희 선생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이곳에서 색동회라는 아동문화단체를 만들었으며, <어린이>라는 호칭을 일반화시킨 잡지를 창간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방정환 선생님은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의 창간을 비롯하여 <신청년> <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한편 동화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1940년 <소파전집>을 박문출판사가 간행하고, 광복 후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 <소파 동화독본>을 펴냈다.
박규수 집 터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배웠으며,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떴다. 고종이 즉위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던 중 진하사로 중국을 다녀오면서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귀국 후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그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곳이 박규수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국가공무원에 대하여 탄핵소추가 의결이 되면 그 때부터 탄핵대상인 국가 공무원은 직무정지 상태가 되며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하여 통과될 경우, 그 때부터 그 공무원은 자격이 박탈된다.
또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간 또는 지방자치단체와 타 지방자치단체간의 분쟁사건과 국가기관의 분쟁사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재판을 한다. 그리고 국민이 국가로부터 인권와 재산 및 기본권을 침해당하였을 경우에 다른 구제수단을 거쳐 최종적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하여 재판을 받는다. 이처럼 헌법 재판소는 일반 재판소와는 다르게 국가기관간의 정의를 심판하는 곳이다.
김옥균 집 터
정독도서관 구내
김옥균은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배웠고, 1872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1881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근대화 진행 과정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양반 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뽑아 쓰며, 상업과 공업을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김옥균은 오늘날 우체국의 전신인 우정국 창설 축하연(1884년 12월 4일)에서 민씨 일파를 처단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를 ‘갑신정변’ 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의 개입과 도움을 주기로 했던 일본마저 철수해 버려 갑신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종친부
정독도서관 구내
조선 역대왕의 어보, 어진을 받들어 모시는 의촉을 만들고 종실의 여러 가지 사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고종 원년에 종부시를 이곳으로 병합하여 종정부라고 개칭하였고, 후에 다시 종부시로 고쳤는데, 순종 때 이를 폐지하고 규장각으로 옮겼다.
종친부의 사무는 왕실 제군, 즉 왕실에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자기들의 인사상 문제와 종친간의 분쟁을 의논하여 그에 따른 문제를 다루던 회의 장소였다.
종친부의 옆에는 의빈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의빈이란 왕의 부마, 즉 공주나 옹주의 남편을 칭하며, 이들도 왕족으로 대우를 받았고, 그들이 모여 의논 및 친목을 도모하던 곳이다.
종로경찰서 터
종로 1가 제일은행 본점
이곳은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이다. 의금부는 왕의 명에 의해 죄수를 감금하고 추국하는 기관이었다. 이곳에서 취급하던 범죄행위는 왕권유지에 위협이 되는 일체의 반란음모, 조선시대의 기본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 양반 관료들의 범죄 등이었다.
일제는 의금부가 있던 자리에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는데 가장 악명을 떨친 종로경찰서를 세웠다. 이곳에서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사람들, 의열단 단원들, 신간회의 간부 등 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체포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종로경찰서는 악명이 대단했다. 경찰 본연의 업무인 치안유지를 핑계로 독립 인사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감금·고문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는 일본인뿐만이 아니라 조선인들도 형사로 고용했다. 아무래도 일본인보다는 언어를 비롯한 각종 조선사정에 밝은 자들이 수사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심한 고문을 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 자리에 제일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독립문
사적 제32호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며,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웠다.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지주 독립을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으며,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문 앞에는 구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앞뒤로 독립문이라는 글씨가 써 한글과 한문으로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영운문의 기초는 사적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3차 근대사기행 때 찍은 독립문의 모습
눈 덮인 독립문과 주의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독립관
독립공원 내
1896년,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모화관 옆에 세운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것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독립협회는 사대주의를 외형적으로 청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서재필 동상
독립공원 내
1884년 12월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모화관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 후 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고, 해방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이승만 등과의 불화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공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1995년 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 11월 개관하였다.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있으며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사형장, 옥사 7개동, 역사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관사와 고문실로 쓰이던 역사전시관에는 영상자료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재현한 매직비전, 형무소 역사실,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독방 등의 옥중생활실 등이 있다. 이밖에 사형장 옆에 시신을 몰래 버리기 위해 만든 시구문이 복원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 전경
일본은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관이 있는 곳에 경성감옥을 짓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잡아 가두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을 없애고 좌절감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경성감옥으로 잡혀온 애국지사들은 심한 고문과 온갖 협박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서대문 형무소의 감옥
유관순열사가 순국한 지하 감옥
유관순열사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으로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가서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뒤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법정모독죄가 가중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열사는 감옥 안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때마다 일제가 잔혹한 고문을 하였으나, 조국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 뒤 일제는 유관순열사를 지하 독방으로 격리 투옥시켜 더욱더 잔혹한 고문을 하였고, 그 고문과 영양실조 때문에 1920년 10월 1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사형장
우정국
사적 제213호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로서, 1884년 종래 역참제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통신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병조참판 홍영식을 비롯하여 15명이 사사가 되어 사무를 분담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영국?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체결하고, 11월 17일 역사적인 근대적 우편제도의 사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개업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12월 9일 폐쇄되었으며,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 2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조선은행
지금의 한국은행
관료자본가였던 김종한과 이완용 등이 발기하여 은행을 설립하였으나 영업이 부진하여, 1900년에 한국은행으로 명칭을 바꾸고 도약을 꾀했지만 1년 만에 폐점하기에 이르렀다. 1909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서 다시 한국은행을 설립하였고, 대한제국을 강점하자마자 조선은행이라고 개칭한 후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여 만주에까지 통용하였다.
한국은행 부설 화폐박물관 앞에서
광통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9호
우리은행 종로지점
광통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점포이다. 광통관이 위치한 광통방은 1890년대의 시전 상인들이나 경강상인들을 대상으로 대금업을 하던 전교환소가 있던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 금융업의 요람이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 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근대은행인 조선은행 등 은행의 설립이 잇 다르게 된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하여 사용한 이 건물은 이오니아 양식의 벽기둥이 전면에 배치되고, 건물 양 날개 부분에 바로크풍의 돔 등이 설치되었다. 1914년 2월 화재로 소실되어 1915년에 복구되면서 박공과 기둥 양식, 돔 등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 건물은 탁지부 건축소가 설계한 건물 가운데 가장 정교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쓰코시 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
1906년 동경본점의 조선지점으로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은 여러 일상 용품들을 점두에 놓고 단순 판매하는 잡화점 수준이던 당시 조선 상점가 판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종업원 300명을 거느린 한국과 만주의 최대의 백화점이었다.
지금의 자리는 1927년에 신축하여 이전한 것인데, 일본 건축가 하야시의 역작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입면에 현관 부분은 전라도산 화강석을 장식조각해 모던한 멋을 부렸다. 건물터 자체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영사관과 합방 뒤 경성부청이 있던 곳인 만큼 이곳은 명실상부한 일본인 상권의 핵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남대문시장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은 1911년 3월 친일파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당시의 거래물품은 미곡·어류·잡화·과실 등이었고, 곡물류가 주상품이었다. 남대문시장에 점포를 내고 있던 상인은 총150개 점포였는데, 1922년 경영권이 일본인 소유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넘어갔으며, 1936년 3월 남대문시장이라는 명칭도 말소하고 중앙물산시장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인들은 한국인 점포를 경성역 부근의 염천교 쪽으로 쫓아버려 몇몇 한국인 점포만 존재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8·15광복 이후에는 남대문상인연합회가 관리·운영하였으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서울 수복 이후에는 주로 이북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고, 미군의 군용 원조물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상동교회
상동교회는 의료선교사 스크랜튼(이화학당의 살립자 스크랜튼 여사의 아들)이 지금의 교회 자리를 사들여 의료선교를 시작한데서부터 출발하였다.
상동교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전덕기목사의 노력 때문이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후에 목사가 되었는데,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1914년 세상을 떠났다.
전덕기가 중심이 된 감리교청년회는 국권회복운동, 신교육, 애국사상고취, 을사5적 자결단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이준열사를 헤이그에 파견하였고, 상동파를 형성 신민회(안창호)의 산실이 되었다.
조선헌병대 사령부
군대내의 경찰인 헌병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19년 만세운동 때 악명 높은 헌병경찰로서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지금은 남산 한옥마을을 복원하였다.
남산골 조선헌병대 자리에 세운 타임캡슐
장충단 비
장충공원
을미사변 대 몸을 던져 명상황후를 지키려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이하여 세운 비석이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 당시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비롯하여 충신열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명성황후가 비명에 간지 5년 뒤 지금의 신라호텔자리에 단을 꾸며, 그 때 죽어간 문무 열사들의 넋을 기리도록 하였다.
이준열사 동상
장충공원
이준 열사는 갑오개혁 이후 신설된 한성재판소의 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신들의 불법행위를 파헤치다가 1개월 만에 면직되었고, 이후 독립혐회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하던 중 1907년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었다. 이때 파견된 특사로는 이준 외에도 이상설, 이위종이 있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 측에서는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참가 자격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인 헐버트도 그곳에 파견되어 특사들의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하사였고, 이위종은 국제주의협회라는 곳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어서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였는데, 그 연설이 신문에 실려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을 만리이역의 공동묘지에 묻고 미국으로 떠났다.
훈련원
국립의료원 건너편 훈련원공원
훈련원은 1392년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서울 동대문운동장 부근의 명철방에 설치하여, 처음에는 훈련관이라 하다가 1467년(세조 13) 훈련원으로 개칭하였다.
이곳애서 1907년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식이 거행되었는데, 당시 군대해산 소식을 전해들은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인 박승환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에 무과시험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다. 무과에 응시한 이순신이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보아 통과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하도감 교장
을지로 6가 동대문 운동장
이곳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훈련하던 훈련소였다. 별기군은 1881년 4월 정부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설치한 신식군대이다. 별기군의 대우는 급료와 초록색 군복 그리고 구식군대보다 모든 면에서 좋은 편이었는데 이러한 차별대우는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구식군인들은 하도감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하였고, 이곳에 있던 별기군 교관인 호리모토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고 결국 대원군에 의해서 별기군은 해산되었으며, 군사제도가 다시 옛 군영체제로 바뀌었다.
원구단
소공동 조선호텔이 세워진 자리
소공동의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이다. 고종은 남별궁이 있던 이곳에 원구단을 지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원구단은 자주독립의 의지가 배인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은 원구단을 헐고 그곳에 호화로운 철도호텔을 지었다. 한나라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신성한 장소를 온갖 잡인들이 묵고 가는 호텔을 지어서 나라를 능멸하였던 것이다. 이 호텔은 후에 조선호텔이 되었다.
황궁우
원구단에는 신위판을 봉안하는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를 1899년에 축조하였다.
돌 북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돌북)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악기인 듯한 석고의 몸체에 부각된 용 모양은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철도호텔
현재의 조선호텔
고종황제는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3층 담장을 쌓고, 그 위에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황금색 지붕을 세워 놓았으며, 그 옆에 하늘과 땅의 여러 신위들을 모신 3층 팔각지붕의 황궁우를 건설했다.
그런데 자주독립의 상징인 원구단을 일본이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1914년 총독부는 황궁우만 남기고 제단인 원구단을 헐어 그 자리에 철도조선호텔을 지었다. 이때부터 황궁우는 조선호텔 후원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광복 후 조선호텔은 더욱 우람한 건물로 개축되었다.
그 후 주변에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황궁우가 어디에 있는지, 원구단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호텔을 찾는 인사들은 황궁우를 호텔에서 세운 옛날 정자쯤으로 알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을지로 2가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 기구인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1908년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로서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서 한국인의 농토를 약탈해서 일본인들에게 불하한 기구로서 한국인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토지를 빼앗기고 살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의열단 단원으로 단신 귀국하여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는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자 식산은행에서 나와 큰 길을 건너 동양척식회사로 뛰어가 수위실에 있던 일본인 수위를 사살하고 임원들을 사살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모두 불발하여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권총 자살하였다.
조선식산은행
롯데벡화점 본점 자리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의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조선총독부는 자본금 1,000만원 중 30%를 출자하고, 중역과 은행원을 일본인으로 충용하여 이 은행의 인사권과 경영권을 장악하였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산업정책금융기관으로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은 조선 내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경제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금융정책기관으로 출범했다.
이 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배를 받으며 성장하여, 일제의 한국경제 침탈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15 후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다가 52년 한국산업은행에 흡수되었다.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 후 1887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건축에 사용한 벽돌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그 모양이 20여종에 달할 뿐 아니라 색깔도 붉은 것과 회색 2종류가 있다. 이들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조화롭고 아름다운 건물을 완성하였다.
명동성당은
고딕식으로 건축된 아름다운 건물이다.
경성역
현재의 서울역
서울역사는 1900년 경인철도 개설 당시부터 가건물(수차 개축)에서 업무를 수행하여 오다가 현재의 역사건물은 1925년 9월에 준공하였다. 같은 해 10월 15일자로 운수영업을 개시하였는데 당시로는 동양 제2의 건물이었다.
자재는 주로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1층 중앙홀은 바닥을 화강암으로 깔고 중벽은 석재, 벽은 인조석을 불인 우아한 건물이다. 건물 내의 귀빈실 마루바닥은 모두 박달나무로 깐 것이 특이하며 현존하는 철도 역사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성부민관
지금의 서울시 의회 건물
이 건물은 당시수준에서는 최고 수준의 난방, 환기, 조명을 갖춘 건물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군군주의를 강화해가자, 이곳에서 한국인들의 황민화를 부추기는 각종 집회와 공연이 열린 장소이다. 춘원 이광수 등이 학병지원을 권유하기 위하여 연설회를 개최하다가 폭탄 투척을 받은 곳도 이곳이다. 한 때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서울 시민회관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시울 시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경성부 청사
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경성부청사는 처음에는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는데,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1906년부터 현재의 건물을 경성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특히 이 청사는 조선총독부 청사로부터 경성역에 이르는 한 복판에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음으로 한국인의 승왕 의식을 꺾고 독립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이곳에 세워졌다.
석조전
덕수궁 내
해방 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다.
준명전
덕수궁 내
1905년 을시5적(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에 의해서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장소
성공회 서울교회
영국대사관 입구
성공회의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에 의해 건립된 교회당이다. 1922년에 착공하여 1926년 5월에 준공되었는데, 영국인 딕슨이 설계하였다.
이 건물은 동양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한국의 전통건축기법을 가미한 동서양의 조화라 할 수 있다. 처마의 끝부분 처리와 화강암의 축조 그리고 창살문양을 도입하였으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사용하였다.
또한 크고 작은 종탑은 율동미와 함께 위계성을 보여주며 사각종탑들은 덕수궁의 팔각기둥과 어울려 마치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의 어우러짐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이룸으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건축물은 19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 당시
세계 건축가들이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선정하여
찬사를 받았는데,
동,서양이 절묘하게 만난 뛰어난 건축물이다.
정동교회
덕수궁 뒤편 정동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 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 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기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정동교호와 배제학당을 세운 아펜셀러 선교사의 흉상
배제학당
정동교회 곁
헨리 게하트 아펜셀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이다. 1884년 4월5일 우리나라에 입국한 아펜셀러 선교사는 의료선교사 스크랜튼의 집을 사서 2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배제학당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학생들이 늘어나자 민가 몇 채를 사서 개축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배제학당이란 교명은 학교설립소식을 들은 고종이 직접지어준 것이다. 이 학교를 통해서 배출된 인물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주시경선생과 같은 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화학당
덕수궁 뒤쪽 정동
이화학당은 조선시대 말기인 1886년(고종 23)5월 21일에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이 한국 여성에게 기독교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서울 황화방,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창설한 사립 여자교육기관입니다. 이듬해에 왕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설립 당시에는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통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 때문에 학생 수용에 어려움을 겪어, 학생 단 한명으로 개교하였는데, 그 해에 3명이 더 들어 오고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어났다. 개설 당시의 교훈은 '모든 일을 단정히 하고 규칙 있게 행하라‘였다.
이화학당은 명성황후가 내려준 교명으로 개교 당시 근처에 배 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화여고의 야외무대에서
Simpson Memorial Hall
이화학당의 초기 한옥교사는 수용시설의 한계 때문에 1896년 헐리고, 1897년 새 교사가 착공되어 1899년 12월에 완공하였는데, 6.25전쟁 때 파괴되었고, 지금은 1915년에 준공을 본 교사(Simpson Memorial Hall)만 남아 있다.
러시아 공사관
이화여고 맞은편 언덕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후 고종은 친일내각에 포위된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자신도 암살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러던 중 1896년 2월11일 새벽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고종과 태자는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경무관을 불러들여서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을 내렸다. 김홍집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고, 어윤중은 피신하는 중 용인에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타살되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약 1년간 머물며 국정을 처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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