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한맺힌 슬픔의 땅 전라도 역사기행 | 조회수 : 204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5-05-23 |
영산강하구둑(목포)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영산강 하구에 건설된 이 방조제는 효과적으로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78년 착공하여 1981년 12월에 완공한 국내 최대의 방조제이다.
남도석성(진도)
사적 제127호로 고려 원종 때 배중손이 진도에 와서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던 성으로 조선 세종 때 고쳐 쌓았고, 숙종 이후에는 남도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진도의 끝 남도석성에 선 답사팀
남도석성 앞의 단홍교
남문의 개울을 건너기 위해서 쌓은 홍교(무지개다리)인데, 편마암 판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만든 보기 드문 다리이다.
남도석성 앞의 쌍홍교
단홍교는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쌍홍교는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운림산방(진도)
조선 후기 화가 허유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로,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 지었다 한다.
운림산방의 소치허공기적비
운림산방에 있는 허유 선생의 업적으로 기리는 비석이다.
운림산방의 초막
운림산방에 있는 초가로 된 살림집이다.
진돗개(진돗개 시험연구소)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돗개는 세계축견연맹으로부터 국제 공인 견종 제 334호로 인정을 받았으며, 영국의 명견에도 가입하였다.
승화후 온의 묘(진도)
삼별초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되어 9개월동안 이 지역을 다스리다가 고려와 몽고의 세 번째 공격 때 죽은 온왕의 묘이다.
용장산성 (진도)
사적 제126호로 고려 장군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성으로 성내에 용장사지·행궁지가 남아 있다. 배중손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강화에서 이곳에 들어와, 관부·영성을 쌓고 고려와 원나라에 저항하였으나, 김방경이 이끈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충무공의 승전 기념비(벽파진)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진도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기념비이다.
명량해협과 진도대교
명량해엽은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명량대첩으로 유명하며,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가장 좁은 부분의 너비는 293 m, 조수의 시속은 평균 16마일에 으로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를 이용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해엽의 위로는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진도대교가 가설되어 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7일에 왜선 13척을 격파하고 15일에는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해엽(울돌목)으로 공격해 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가 지위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전라우수영 터(해남)
조선시대 전라우도 수군 본부의 옛터로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 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위력이 컸으며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땅 끝(해남)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한반도의 최남단 마을로 토말이라고도 한다. 해남읍 남쪽 43.5km 지점인 이곳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으로 이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룬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해남의 땅 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극북의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이로부터 ‘3,000리 강산’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맴 섬(땅끝)
땅 끝 마을 선착장 옆에 있는 섬인데, 맴섬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은 유명하다.
완도의 장도(징군섬)
통일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
장보고가 청해진에 설치한 목책
장도의 남쪽 갯벌에는 청해진의 방비를 위해 섬 둘레에 설치했던 통나무 목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물이 완전히 빠지면 목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해신 드라마세트장(신라방)
신라방은 삼국통일 후 신라의 무역이 발달하면서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해안지대에 이주하여 집단거류지를 이루었는데, 이를 신라방이라 하였다. 참고로 신라관은 여관, 신라소는 신라인을 다스리던 관청, 법화원은 신라인을 위한 절이다.
녹우당의 앞 뜰 연못
해송으로 둘러 쌓인 연못으로 두개의 네모난 섬이 이채롭다.
다산초당(강진)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으로
초가집이었던 것을 1957년 화재 이후
기와로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의 정석 글씨
앞마당의 넓적한 바위, 집 뒤의 샘, 그 뒤편의 바위에 새긴 다산의 글씨이다. 바르게 살겠다는 그의 결의와 다산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다산초당의 천일각
황사영 백서사건 이후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정약전을 그리면서
멀리 바다를 내다보던 곳으로
다산이 학문을 하다가 잠시 쉬거나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던 곳이다.
영랑생가로 들어가는 돌담(강진)
한국 현대문학 초창기의 시인 김영랑(본명 김윤식)의 생가이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여 우리나라의 순수시,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죽었다.
영랑생가
영랑생가는 현재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 모란밭을 포함한다. 집주인이 여러 번 갈리면서 원래의 모습이 조금 바뀌었으나 강진군에서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영랑은 이 방에서 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영랑생가의 사랑채
하루 종일 볕이 드는 널찍한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영랑생가는 지주집으로서는 그리 큰 규모라고 할 수 없지만 행랑채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채와 본채에 이르기까지 꽤 짜임새가 있다.
5.18 민중항쟁 기념탑(광주)
5.18 국립묘지 내의 묘역에 세운 기념탑이다.
5.18 민주항쟁 추모탑 앞에서
이 추모탑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역사가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5.18 국립묘지
5.18 국립묘지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소쇄원(담양)
기묘사화로 인하여 스승인 조광조가 능주(전남 화순)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고 죽자 스승을 따라 능주로 갔던 양산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55세로 죽을 때까지 자연에 묻혀서 지냈다. 이때 지은 별서가 소쇄원이다.
사진은 소쇄원의 중심 건물인 광풍각으로 대붕대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대나무 숲길
담양의 아름다운 정원인 소쇄원은 들어가는 길목에 대나무로 숲길을 조성하여 더욱 운치있게 하였다.
대봉대(소쇄원)
소쇄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초가로 이것에서 보면 소쇄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애양단(소쇄원)
이 부근의 볕이 유난히 바르다는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 겨울 계곡의 물이 다 얼어 있어도 이곳의 눈을 녹았다고 한다.
매대(꽃 계단/소쇄원)
비탈의 침식을 막기 위하여 화계를 만들고 매화를 심었다.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이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박혀 있다.
매대(꽃 계단/소쇄원)
비탈의 침식을 막기 위하여 화계를 만들고 매화를 심었다.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이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박혀 있다.
광풍각에서 제월당으로 오르는 계단(소쇄원)
광풍각은 소쇄원의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중심공간으로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과 선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고아풍각에서 제월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아름답다.
소쇄원을 흐르는 계류
소쇄읜을 흐르는 물은 오곡문을 통하여 들어와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오곡문(소쇄원)
담 밑으로 널찍한 바위를 걸쳐 놓아 소쇄원으로 흘러드는 냇물이 자연 그대로 흐르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게 된다.
환벽당 (담양)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윤제가 을사사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당으로 그는 이곳에 자연을 벗삼아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제자로는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조대(환벽당)
환벽당 아래의 창계천 가에 있는 큰 바위인데, 김윤제가 자기를 찾아온 손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곳이다. 조대 앞의 개울에서 목욕을 하던 정철이 김윤제의 눈에 띠어 그의 제자가 된다. 멀리 앞쪽에 보이는 뾰족한 산이 성산(별뫼)이다.
가사문학관 (담양)
담양에는 가사문학의 대가들이 모여 있었고, 유명한 가사문학 작품들이 나왔는데, 가사문학관은 그 작품들과 그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전시해 두고, 시청각 자료들을 보여주는 곳이다
석영정(담양)
성산의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에 오르는 길
식영정은 성산의 한쪽 끝 언덕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이곳이 성산별곡의 무대이다.
명옥헌 정원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명옥헌은 오이정(1619~1655)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오희도)가 살던 곳에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을 축조하고, 그 연못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 이룬 것이다.
명옥헌에 들어가는 길
명옥헌의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둘러서 있어서 정자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명옥헌
명옥헌은 명옥헌 정원에 있는 정자인다. 한천의 흐르는 물소리가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다고 한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송강정에 오르는 길(담양)
송강정에 오르는 게단이 노송에 둘러싸여 아름답다.
송강정
선조 때 정철이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를 지었다.
사미인곡은 제명 그대로 연군지정을 읊은 노래이다. 임금을 사모하는 심경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사에 비겨 자신의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아름다운 가사문학의 정취가 배어나는 글이다.
면앙정(담양)
1533년 송순이 건립한 정자로 이황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다. 가사문학의 최고봉인 면앙정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대나무 박물관(담양)
대나무 주산지이며 전통적 죽제 민예품의 명산지인 담양에 죽제품의 전시, 시연, 판매, 체험 등을 목적으로 세운 대나무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동서양의 대나무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다.
죽록원(담양)
대나무생태공원인 죽록원 입구의 돌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고 오르며 굳어있던 몸을 풀고 나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대 바람이 일상에 지쳐있는 심신에 청량감을 불어 넣어준다.
또한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 순간 빽빽히 들어서있는 대나무 한가운데에서 있는 자신이보이고 푸른 댓잎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는 기분 또한 신선한 곳이다.
관방제림의 노인들(담양)
200~300년 생의 아름드리 고목이 만들어준 시원한 그늘에서 소일하는 노인들이 한층 여유롭다.
관방제림의 전경
관방제림은 담양천을 따라 천변리까지 약 2 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숲이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고창읍성(고창)
고창읍성은 조선의 초기 성곽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성이다. 둘레 1,684m로서 모양성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동헌(고창읍성)
동헌은 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주재하는 관청의 본 건물로, 수령이 사무를 집행하던 건물의 대청을 이르기를 말이다. 수령이 쉬는 살림집은 내아(서헌)라고 한다.
고청읍성의 옥
고창읍성의 옥은 북문을 들어서자마자 자리 잡고 있는데, 아마도 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여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고창읍성의 객관
고을을 방문한 손님들을 맞이하여 쉬도록 하는 건물인데, 주로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머물면서 교지를 전달하였다.
답성놀이(고창읍성)
여인들이 돌을 날라다 성을 쌓은 것에서 비롯된 전통놀이인데,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세 바퀴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의 북방식 고인돌(고창)
북방식 고인돌은 4∼6개의 널빤지 모양의 지석(굄돌)으로 상자모양의 석실을 지상에 구축하고, 그 위에 거대한 널빤지 모양의 돌을 덮은 형식을 말한다. 주로 북쪽 지역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북방식이라고 한다.
남방식 고인돌(고창)
남방식 고인돌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대형판석을 3·4개의 작은 돌로 받치고, 지하에 매장시설을 한 것이다. 이런 형식은 주로 호남, 영남지방에 많으며 중부지방에도 상당수를 보이고 있으나 북한 지역에서는 발견된 예가 아직 없다.
고창 상갑리 고인돌 군
상갑리 일대에는 5만여 평에 1,000기 이상의 고인돌리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결과 북방식 3기, 지상 석곽식 44기, 남방식 251기, 기타 불명이 149기로 전체 447기가 확인되었다. 크기는 길이 1m 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며 3m 미만이 80%, 3m 이상이 20%, 4m 이상이 21기로 그중 6기는 5m가 넘는다.
고창 상갑리 고인돌 군
사적 제 391호로 지정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에 걸쳐 있는 청동시대 고인돌군은 거의 남방식이지만 드문 드문 북방식도 보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석식고인돌(고창)
개석식고인돌은 큰 덮개돌 아래 지지하는 지석이 없다. 외관은 상석을 지상에 위치하여 얼른보아 너럭바위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을 하지 않으면 고인돌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이다.
선운사
선운사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진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주변의 경치가 빼어난 절이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숲과 상사화가 유명하다.
선운사 만세루
덩치가 크면서도 낮은 강당이다. 다른 건물들을 짓고 남은 목재로 지었다고 한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삼고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선운사 부도밭
추사가 쓴 백파선사 부도비를 비롯하여, 시대가 따라 조금씩 다른 많은 부도가 서 있다.
동백나무 숲(선운사)
5천여 평에 이르는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수령이 약 500년으로 천연기념물 184호이다.
송악 덩굴(선운사)
천연기념물 367호. 바위벽에서 어마어마한 생명력으로 자라고 있는 송악덩굴은 담장나무라고도 한다. 해안과 도서지방의 숲 속에서 자란다.
곰소 염전(변산반도)
곰소염전은 1942년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이 지역에 군항을 건설하기 위하여 진서면 연동마을에서 곰소를 연결하는 제방을 축조하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곰소가 육지가 되고 북쪽으로 염전이 형성되면서 개발되었다.
채석강 (변산반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에 있는 해식절벽으로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채석강 해식절벽의 지층
채석강은 오랜 세월 자연이 빚은 퇴적예술의 걸작이라 할만큼 경관이 빼어나며, 다른 퇴적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가 많고, 퇴적된 과정들이 절벽에 입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어 학술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높다.
채석강에서의 즐거운 물놀이
우리가 채석강에 도착했을 때는 물때가 맞지 않아서 아름다운 경관을 모두 보지 못하고 입구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돌아왔다.
불멸의 이순신 야외세트 (부안 변산반도)
인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해상 전투신을 촬영하는 야외 세트이다. 마침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어서 많은 소품들과 배우들을 볼 수 있었다.
동학혁명 모의탑(정읍)
갑오농민전쟁을 모의하던 장소에 세운 기념탑으로 혁명거사가 논의되고 혁명지도자들의 굳은 결의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 마을에 거주하던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명의 지도자들이 혁명계획을 마련하였고 또한 그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사발통문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 주위에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만일의 경우 그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할 수 있는 알림문서이다.
황토현 전적지(정읍)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로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하는 요지였다. 1894년 봄 고부군수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 1만에 가까운 군세로 백산에 집결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수 천 명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소탕하게 하였다.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는데 농민군이 기습공격을 하여, 대부분의 관군이 전사하였는데, 농민군은 이를 계기로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
전봉준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녔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하고 비참했는데, 왕 이하 귀족들은 권세 다툼에 눈이 어두워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폭정 때문이었다. 전봉준의 지휘아래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그 후 전주성을 비롯한 호남 일대와 경상도꺼지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일본의 지원을 받은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혁명군은 격파되고, 전봉준은 잡혀서 1895년 3월 29일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말목장터(정읍)
말목장터는 농민봉기의 불이 번지기 시작한 역사적 장소이지만 그날을 되새길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터만 있다.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손에 괭이와 죽창을 들고 이곳에 모여 고부관아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만석보터(정읍)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만석보가 있던 곳인데, 고부 군수 조병갑은 이곳에 보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물세를 받았다.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멀쩡한 보가 있었음에도 새로이 보를 쌓고, 그 세금을 거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의 상징이었던 탓에 분노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부수어 버려 지금은 비석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굽이굽이 삼/백/리/
아름다운 남도 길을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토의 서정이 흠씬 묻어나는 곳입니다.
가는 곳마다
정겨운 어머니 품속 같은 길을 굽이돌아
남도의 정취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치열한 삶의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아픔을 마주서며
그곳에서
때로는 눈물겨운 남도의 역사를 만나고
때로는 꿈에 본 듯 아름다운
남도의 자연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남도기행에 참가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사진/담양의 명옥헌 정윈에 핀 목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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