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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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역사의 박물관 강화도 역사기행 조회수 : 790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4-11-12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이번 겨울역사기행은 강화로 다녀왔습니다. 역사 박물관 강/화/ 이 작은 섬 강화는 선사시대로부터 분단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땅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섬 구석구석 쌓여있는 역사의 먼지를 털어내고 켜켜이 쌓인 고난의 퇴적층을 들춰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섬의 부끄러운 역사를 당당하게 극복하고 이 민족의 역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갈 시대의 주역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삼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1593년 2월 12일 새벽부터 시작된 싸움은 종일 계속되었고, 어두워질 무렵에는 무기조차 바닥이 나서 석전과 육박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성 내의 부녀자들이 총출동하여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아낙네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은 행주산성전투의 명장 권율의 동상이다.



정상에 우뚝 선 행주대첨 기념비
근래에 유적 정비사업을 하면서
새로 세운 세 번째 비석이다.



산성 정상의 오른쪽
아담한 비각 안에 서 있는 비석은
장군이 돌아가신지 3년 후인 선조35년에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이
당시의 전투상황을 상세히 묘사하여
세운 비이다.



행주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남북교통을 장악하는 요충지로서
신라 때 쌓았다는 토성 터가 남아있다.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와 마주하고 있는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이다. 설치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인 이유는 바로 한강하류를 초입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곳이 적에게 뚫리면 적의 배는 한강을 타고 마포까지 별 무리 없이 올 수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양을 지키던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때 적의 배가 마포까지 올라온다면 한양 점령은 시간 문제일 만큼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덕포진은
강화를 마주 보고 있는
김포의 끝자락에 있는 유적지로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이곳을 찾아도
후회 없는 여행이 될 만한 호젓한 장소이다.



이 곳의 돈대와 포대 및 파수청이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선조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파수청터이다.



손돌목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고려 고종이 강화로 건너갈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했는데, 가다가 갑자기 뱃길이 막히고 물살이 거세지자 손돌이 자기들을 사지로 인도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왕은 즉각 처형을 명하였다.

죽기 전에 손돌은 바다에 바가지를 하나 띄우면서 “내가 없더라도 이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왕은 끝내 손돌을 처형하고 말았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뒤부터 이곳을 손돌목이라 불렀다.

사진은 뱃사공 손돌의 묘이다.



덕포진 가는 길목에 있는 교육박물관
김동선 선생님이 36년간의 교직생활 중에
관심이 있어서 모아둔 것과
교육 박물관을 위해 폐교에서 가져온 물건
그리고 기증된 물건들을 중심으로
약 5000점 이상의 교유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박물관이다.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공부하시던 교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역사기행팀은 이곳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공부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명포구의 일출
염하 건너편 김포 쪽 산등성이를 타고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강화해협을 가운데 두고
강화도와 마주하고 있는 대명포구
흔히 소래포구와 비교되는데
솔직히 소래보다는 어시장의 규모나
북적임을 볼 때 규모가 작아 보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적과 맞서 줄기차게 싸운 전적지인 초지진은 신미양요가 일어 난지 4년이 지난 1875년에는 일본군이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 군함 운양호를 들이대고 행패를 부렸다.

드디어 접전이 벌어졌지만 우리의 주무기는 구경12cm에 사정거리 700m에도 못 미치는 대포였고, 일본군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함재포를 적재하고 있었다.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우리는 35명의 전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일본 측은 겨우 경상자 2명만 발생한 일방적인 패배였다.

이것이 소위 운양호사건인데, 그 결과로 다음 해에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침략의 마수를 힘차게 뻗어 오고 있었다.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에 속하여 첨사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다



남장포대는 강화 9개 포대 중의 하나이며
덕진진에 소속되어 대포 10문이 설치되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함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여
심한 피해를 입혔으나,
끝내 병기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덕진돈대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염하를 지키는 중요한 돈대이다.

 



덕진돈대의 난간에 걸터앉은
3차기행팀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조선 고종 4년(1867)에 흥선 대원군의 명에 따라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덕진돈대와 염하 사이의 언덕에 세운 경고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보여주는 비석이다.



고려 때는 물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외세가 밀어 닥치던 당시의 강화도엔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군 편제를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휘부였던 진이 대대급이었다면 보는 중대급이요, 돈은 분대급의 초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에 접한 고려 때 외성이었던 것을 보수하고 성문을 건립하여 여러 돈대 들을 이에 소속시켰는데,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과 공방전이 펼쳐졌고, 신미양요(1871)때는 미군함대에 의하여 초지진, 덕진진이 점령되고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는 등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광성돈대
광성보에 속한 돈대로
강화의 53돈대 중 하나이다.

 



쌍충비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비각이다.
중군장이었던 어재연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이 200명의 휘하 군사와 함께
‘적에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고
결의하고
이틀 동안 사투를 벌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무참히 전사하고 말았다.



신미순의총은 통상을 앞세워 침입한 미국군대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신 선열들을 모신 곳이다. 하나의 분묘에 7~8인을 합장하였다고 한다.

그 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 따스한 햇살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이곳에서 다시는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용두돈대 바로 밑을 흐르는 물이
빙빙 돌아 소용돌이를 치며

파도가 험하기로 유명한 손돌목이다.
이 돈대는 손돌목 돈대이다.

 



광성보에서 해안의 성터를 따라
용두돈대로 가는 길은
전적지답지 않게 숲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답기만 하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을 이용하여 설치한 천연의 교두보
용두돈대가 있다.



갑곶돈대에 자리잡은 강화역사관
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1차기행 팀이다.



갑곶진의 이섭정에 오르면
바다와 주변평야가
시원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던 정묘호란 때
성곽을 보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성곽 주위에 촘촘히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그루가 외롭게 남아 있어
400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갑곶진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있는 것이 갑곶돈대이다.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과 항전하면서 끈질기게 해협을 지켰던 요새였다.

폭 200~300m밖에 안 되는 염하를 건너지 못한 몽골군은 건너편 문수산에서 내려다만 보고 있었으니 천혜의 요새임에 틀림없으나 병자호란 때 조선의 군사들은 물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으니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춘 요새라도 지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곳이다.

갑곶돈대는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조선시대에는 프랑스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치르던 요새로 "갑곶"이란 말은 병자호란 때 월곶 해안의 거센 물살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없음을 탄식하던 청나라 군사가 "우리 군사들의 갑옷을 한 데 꿰어 다리를 만들어도 강을 건널 수 있으련만" 했던 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선원사는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후 창건된 절로서 순천 송광사와 함께 고려시대 2대 사찰로서 당대의 이름 높은 국사와 고승들이 이끌었던 절이다.

이곳은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지휘 감독했던 대장도감의 본사가 설치되었던 곳인데, 지금은 황량한 빈터만 남아 있다.



백운 이규보 선생은 고려의 문호로서 고려 고종 28년에 몽고의 난으로 천도했을 때 임금을 모시고 이곳 강화도에 왔다가 이곳에서 재상을 지내고, 74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그의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기원문인 대장경각판 군신 기고문 등이 있으며, 몽고정부에 보내는 외교문도 이 분이 쓰셨다. 또한 유교, 불교에도 정통한 문인으로 시와 술, 거문고를 너무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진은 이규보 선생의 묘소이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마니산은 그리 높지 않다. 469m. 정상까지 918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초등학생에게는 조금 버겁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번 도전해볼 만한 곳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 거리의 등산로는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만주단풍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섞여있다. 마니산 정상에 서면 강화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썰물 때 드러나는 광활한 개펄은 검은빛으로 반짝거린다.



마니산 정상에서 우리는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진은 2차 역사기행팀이다.



참성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도교의 사상대로 윗 제단은 네모로, 아랫 제단은 둥글게 돼 있다. 4,300여 년 전 단군이 제를 지낸 이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왕들이 머나먼 이곳까지 행차해 태평성대를 빌었다고 한다.

참성단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올라가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니산 정상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선 2차 기행팀
구름이 많이 낀 탓에
어렴풋한 태양을 보았을 뿐이다.



바다는 넓고,
섬의 높은 언덕마다 돈대라 부르는
초소가 들어서서 외세의 침입을 살폈다.
그 옛날 화포의 연기와
병사들의 함성을 사라지고,
바다는 한없이 평온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파수꾼이 밤새도록 수고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것 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사진은 분오리 돈대이다.



오상리 일대의 고인돌 가운데 내가 지석묘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대형 판석 한 장을 덮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고인돌의 돌방(석실) 축조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고인돌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에 산재 해 있는고인돌의 수는 북한 지역의 3,160여기를 포함해서 약 29,510기에 이른다. 이는 약 5만기로 추정되는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을 넘는 숫자인 것이다.

사진은 오상리 고인돌 군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하점면 5층석탑은 강화도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소박한 염원을 담고 서 있다. 발견 당시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에 보수·재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상륜부는 아예 없어졌고 몸돌 위의 지붕돌도 많이 손상되어 있다. 비록 손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 우수한 솜씨로 빚은 탑은 아닌 것 같다.

이 탑은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1234년 창건해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스러져간 봉은사라는 절을 세우고 그곳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봉은사는 원래 개성에 있던 절로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 광종 2년(951)에 창건되어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던 고려의 국찰로 중요한 절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강화에는 고인돌이 유난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것이 강화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북방식 고인돌’의 대표격으로 역사책에 흔히 등장하는 고인돌로서, 높이 260㎝, 덮개돌의 길이 710㎝, 너비 550㎝로 남한에서 가장 큰 것이다.

덮개돌의 무게만도 50톤이나 된다는 이 고인돌은 두 개의 높은 굄돌(지석)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서 시신이 매장되는 돌방(석실)을 지상에 노출시킨 북방식 무덤이어서 그 모습이 매우 씩씩하고 장쾌하다.

넓은 벌판 밭 가운데 있는 이 무덤의 거대한 이 돌을 어디서 운반해 왔는지, 그리고 굄돌 위에 얹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아마도 수 천 명의 부족을 거느렸던 막강한 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튼튼하게 축조된 고인돌이라도
세월의 힘을 막을 수는 없는가 보다.
우리가 본 고인돌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부근리 점골 고인돌에서
우리는 역사의 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 위에
남문 옆이 성곽과 연결해 설치된
홍예수문인 강화산성 석수문이다.



연무당 터는 강화부의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이며,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1876년)을 체결한 뼈아픈 곳이기도 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인천·부산·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국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빼앗기는 결과를 맞았다. 신문물이 들어온 현장임과 동시에 민족 시련이 시작된 반성의 터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강화산성 서문의 누각은 첨화루이다. 누각에 오르면 강화 시내 전부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탁 트였다. 적을 살피기에는 그만이었을 것이다.

야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복원되어 있고, 다소 수선스러운 남문에 비해 잘 정돈된 주변이 한가롭다.



용흥궁은 강화도령 철종이 열아홉 살까지 살던 오막살이 집터에 당시 강화유수 정기세가 세운 집이다.

용흥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사람이 살고 있는 살림집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라는 비각이 서 있다.



원범(철종)의 어린시절은 불행했다. 증조할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었고, 할아버지는 역모에 몰려 죽었으며, 아버지와 형도 또 다른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할머니, 큰 어머니도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이라 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어려서부터 부모, 형제가 죽임을 당하는 참상을 수 없이 목격한 그였다.

헌종이 아들 없이 죽자 7촌 아저씨였던 원범이 제일 가까운 왕족이었다. 이에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이뤄 낸 순원왕후는 순발력있게 철종이 즉위시키고, 친정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책봉하니 이때부터 철종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갔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민란과 동학운동을 수습할 길이 없어 고뇌하던 철종은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왕위에 오른지 14년 6개월만인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뜨고 만다.



병조, 예조, 이조판서와 우의정까지 역임했던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자, 비빈과 함께 강화에 내려와 있었으나, 이듬해 1월 강화성이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김상용선생 순절비는 청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순국한 절의를 기려 세운 비석이다. 삼학사의 한 사람인 청음 김상헌의 형이기도 한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 때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영국에서 한국 초대 성공회 주교로 서품 받은 코프 신부가 1900년에 한옥구조를 빌어 지은 특특한 성당이다.

겉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절집과 같은 강화성당은 동서양의 문화가 만난 아름다운 성당이다. 궁궐을 짓는 도편수에게 건축을 맡겨 백두산 소나무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강화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39년간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머물렀던 고려궁터이다. 규모는 작으나 송도(개성)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도성도 지금은 ‘강화읍성’으로 불리는 내성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중성과 외성까지 쌓아서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장기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39년이라는 긴 항전 끝에 강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기진맥진하여 헤어날 길이 없으므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대로 스스로 성을 허물고 나와 항복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던 고려궁터에 조선 인조 때 행궁을 건립하고 강화유수부, 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거듭되었다.



강화부 동헌
고려궁터(조선행궁) 안에 있던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다.

 



강화부 이방청
6방(이,호,예,병,형,공)중의 하나인
이방이 사무를 보던 곳이다.
동헌과 함께
병인양요 때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단 두 채의 건물이다.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다 실패한 강화부 동종
꾸밈이 없이 간결한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강화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축성되었으나, 몽고군의 침입 때 화친의 조건으로 외성과 중성을 헐었다가, 조선 초에 다시 축성한 외성은 병자호란 때 다시 청군에 의해 파괴되고, 몇 군데 석축으로 복원한 곳 말고는 현재 외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내성도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동쪽 성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성의 남문을 안파루, 서문을 첨화루, 동문을 망한루, 북문을 진송루라 불렀다.

북문에 도착하면 누각 앞쪽으로 제법 너른 공터가 있고 누각에는 진송루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누각 옆쪽으로 루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으로 올라서서 보면 앞쪽으로 휴전선 너머 개성 땅이 보인다.



산으로 향해있는 계단식 산성은
북한산성의 산성형식과 비슷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삼랑성(정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 일대는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단군 왕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한 뒤 궁궐 지을 자리를 물색하다가 삼랑성과 그 아래 신니동에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려 고종 이전에 이미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고, ‘신니동’이라는 마을이 어쩐지 마니산의 단군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1866년9월 7일. 갑곳돈을 함락 시키고 강화를 장악한 프랑스군은 기전 태세를 취하면서 겨울 날 곳을 물색하여 선정한 곳이 정족산성 이었다

조선군의 무기가 보잘 것 없는 것을 알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프랑스군은 16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침공해 왔다. 이때 정족산성의 수비대장이었던 양헌수장군은 프랑스군이 침공해 올 것으로 예측하고, 전국에서 모집한 367명의 포수를 매복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성으로 거침없이 들어왔고 적군의 유인에 성공한 우리 군은 양헌수장군의 지휘 하에 사력을 다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당황했고, 곧 신무기로 응수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30여명의 부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마침내 다수의 무기를 버린 채 도망치고 말았다. 구식무기조차 빈약한 조선군이 신무기를 앞세운 프랑스군을 무찌른 쾌거였다.



정족산성에 들어서면
입구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서 있다.
정족산성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
그날의 격전을 말해 주는 듯하다.

 



전등사는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 미추왕2년 (263)에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법을 전파하기 전, 이곳에 진종사를 세우고, 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절이다.

고려 충렬왕비 정화공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라고 했다지만 그보다는 진리의 등불을 전한다는 불교본래의 의미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정화공주가 전했다는 그 옥등이 이 절의 소중한 보물이 되어 전해 오고 있다.



굵은 배흘림기둥에 모서리를 약간 높게 추켜세워 처마 끝이 날아갈 듯 들리도록 한 전등사 대웅전은 안정감이 있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기둥에는 낙서가 있는데 강화를 지키던 병사들이 무사귀환을 바라며 쓴 것이라고 한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족산성에는 또 하나의 유적인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던 자리이다.

조선왕조는 국서가 전란이나 화재로 소실될 것에 대비하여 한양의 춘추관을 비롯한 충주 성주 전주의 네 곳에 각각 분산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남았다. 그 후 전주 사고본을 재인쇄하여 춘추관과 강릉 오대산, 봉화 태백산, 강화 마니산, 무주 적상산 등 다섯 곳으로 분산 보관했고 이를 오대사고라 한다.

오대사고의 하나였던 마니산 사고를 헌종 1년(1666)에 이곳정족산으로 옮겼고, 그 후 다시 고려궁터에 새로 지은 외규장각으로 옮겼다가 프랑스군의 화를 입었고 얼마 남지 않은 서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2차 기행팀이 사고를 찾던 때는 눈이 펑펑 쏟아지던 늦은 저녁이었다.



임진각의 망배단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
그리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건립한 제단이다.

 



1953년 전쟁포로를 교환하기 위해
가설한 나무다리인
자유의 다리 북쭉 끝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걸개들이
수 없이 걸려 있었다.



이번 여행은
선사시대로부터 분단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둘러본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민족 역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을 꿈꾸었다.

 



1953년 7월 27일 철도운행이 중단된
철도 종단점.
후 철도가 운행되지 않다가
최근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도라산 역까지
운행이 재개 되었으며,
2003년 6월 14일 이후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임진각 못 미처 임진강 가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백리 황희 정승이 말년에 갈매기를 벗하여 즐기던 정자 반구정이 있다. 임진강 가에 섬처럼 홀로 서 있는 산이 있어서 묘한 경치를 이루는데, 그 가파른 언덕 위에 강물을 접하여 사방 한 간의 4각형 정자가 서 있는것이다.

젊은 날에 들을 지나다가 농부로부터 ‘짐승이라도 못하다는 말을 좋아 할 리 있겠느냐’ 는 말을 들은 후로 평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는 황희는 60여년을 관직에 있었고 영의정을 18년이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멍석자리에 누워 말년을 보낼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노송이 우거지고 바로 앞에는 임진강이 활처럼 휘돌아 흐르는 경치 좋은 언덕 위에 화석정이 서 있다. 그 아래 마을이 ‘밤골’ 이어서 지금도 율곡리이며, 율곡 이이선생의 호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은 율곡선생이 강릉 외가에서 올라와 어린시절 자연을 즐기며 공부하던 곳이요,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제자들과 시문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곤 하던 곳이다.

선생은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수석합격)하여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리기까지 한 천재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이곳에 당도했는데, 때 마침 폭우가 내리는 칠흑 같이 어둔 그믐밤이어서 임진강을 건널 길이 막막했다. 이때 길을 인도하던 도승지 이항복이 "강 언덕 위에 정자가 있을 것이니 찾아서 불을 지르라.”고 했다. 그래서 불을 질렀더니 폭우 속에서도 불길이 치솟아 나루를 대낮 같이 밝혔고, 왕과 그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하는 정자이다.



율곡선생을 모신 자운서원은 기호사림의 본산으로서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과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현석 박세채를 함께 배향한 서원이다.

광해군 7년(1615)에 창건되고, 효종 원년(1649)에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 되었던 것을 1970년에 복원한 것이다.

건물보다는 수령 400년 가까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버티고 서 있었어 유적다운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자운산의 골 안에는 율곡의 부모 묘를 비롯한 13기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의아스러운 부분이 발견된다.

맨 위에 율곡 선생 내외분 묘가 있는데 위에는 부인의 묘가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묘가 있으며, 그 밑에 일직선으로 율곡의 맏형 내외 묘, 그 밑으로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 묘, 그리고 그 밑으로 율곡의 맏아들 내외 묘가 있다.

부모의 묘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쓰는 것은 역장이라고 하여 금기하던 일인데, 이렇게 묘를 쓴 것은 율곡의 부모가 자식을 등에 업고, 손자를 품에 안은 형상이라고 한다. 지극한 자식 사랑이다.



제주, 거제, 진도, 남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의 역사는 단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사시대의 막강한 지배계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의 고인돌 무덤이 강화 전 지역에 산재해 있다.

강화에 산재한 요새(돈대)들은 이 땅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를 전쟁터였는가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근대에 들어서도 프랑스의 병인양요, 미국의 신미양요, 일본의 운요호사건 등이 일어났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남북분단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보듬고 있는 땅이 강화이다.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여전히 이 나라의 서쪽 바다를 지키고 서 있는 섬 강화, 그 섬에서 어둠을 뚫고 다시금 떠오르는 희망의 태양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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