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한반도의 등줄기 동해안 역사기행 | 조회수 : 968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4-07-17 |
이 페이지에 올라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선돌은
서강가에 자리잡은
높이 70m 정도의 큰 바위이다.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하는데
선돌은 푸른 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봉래산은
영월 8경의 하나로
단종을 복위 시키려다 실패한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시조에
나오는 산이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랑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정청하리라
낙화암은
단종이 상왕일 때 모시던 궁녀들이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이곳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죽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관풍헌은
단종이 사약을 받은 곳이다.
청령포에 위패 되어 있던 단종은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거처를 관풍헌으로 옮겼다가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과거에 급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왕릉은 대개 입구에서부터
홍살문(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정문),
참도(정자각에 이르는 돌길),
정자각(丁 모양의 건물로, 제사를 올리는 곳),
비각(능의 비석을 안치한 곳) 등을 갖추고 있다. 또 봉분의 아랫부분은
12각의 병풍석이 두르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혼유석이라고도 함),
망주석, 장명등 등이 있다.
봉분 주변에는
석호 석양 석마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된다.
장릉이 가지고 있는 특징
1.문화제로서 제향이 거행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왕릉
2. 조선시대의 왕릉을 한양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그 규례를 깬 유일한 왕릉
3. 낮은 언덕에 자리 잡은 다른 능과는 다르게 높은 산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점
4. 규모는 크지 않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
장릉은 단종이 사약을 받은 후
영월 호장 엄홍도가 급히 시신을 붇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장릉에 오르는 길은
잘 자란 소나무가 아름다운데,
묘하게도 능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절을 하듯 틀어진 것이 많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영조 때 세운 금표비와
유지비각이 남아 단종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은 왕방연 시조비에서 바라본
청령포의 모습이다.
관음송은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이다.
영월 땅에 생존하는 생물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보았으니
관(觀)이요,
하염없는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音)이라 하여,
관음송( 觀音松)이라 부른다.
유지비각은
단종이 머물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영조 39년에 어명으로
원주감영에서 세운 것이다.
비각 앞에는 길게 누운 자세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나뭇가지가 땅에 닿을 듯 하다.
단종에게 사약을 집행하였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왔던 그날 밤,
어명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마주보는 강 언덕에서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읊었다.
비록 공무를 수행하였지만
사적인 감정은 숨길 수 없었던 듯하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었던
석탄의 역할과 그 역사적 사실들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전시한 곳으로,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지하전시실 1개,
옥외 야외전시실 각 2개 등을 갖춘
세계 최대의 석탄박물관이다.
미인폭포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내려 온다. 콧대가 높은 미녀가 신랑을 고르다가 나이가 들었는데, 한번은 마음에 드는 총각이 나타나 결혼을 하려하니, 그 총각이 이르기를 할머니가 무슨 농담이냐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을 물에 비춰보니 할머니처럼 늙어버린 처녀는 절망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폭포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해발 700미터 안팎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안개나 구름이 끼는 날이 많으며, 이때 경치가 더욱 아름답고 신비하다.
한국판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미인폭포 주변의 통리협곡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신생대 초의 심한 단층작용과
강물에 침식되어
270m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색을 띠는 것은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퇴적층이 공기 중에서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역암(자갈)과 사암(모래),
이암(진흙)으로 구성되어 있다. .
너와집은 옛날 화전민들의 집으로
일반 집과는 달리 지붕을
너와(두꺼운 널빤지 조각)로 이은
특수한 형태의 집이다.
너와집 하나를 지으려면
산 하나를 깎아야 한다고 할 만큼
많은 나무를 필요로 한다.
너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거운 돌을 얹거나 통나무를 얹어
지붕을 눌러 놓기도 하였다.
굴피집은
참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지붕을 얹은
강원도의 전통가옥으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문화가 전수된
일본에서도
나무껍질을 여러 켜로 이어 만든 지붕을
찾아볼 수 있다.
통방아는 곡식을 찧는 틀로
물방아의 일종이다.
통방아는 수통에 물을 채우고 비움으로써
동작하는데,
물통에 물이 담기면 그 무게로
공이가 올라가고 그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떨어져 방아를 찧게 된다.
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개울 옆에 설치하는 통방아는
사람이 발로 디디는 디딜방아에 비해서
힘이 들지 않아 편리하다.
이 통방아의 공이 위에는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았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위치한 환선굴은
동굴입구와 출구가 동일한 순환형으로
구경하는 이에게 최대의 만족감을 준다.
내부에는 지하수와 빗물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이
천태만상의 장관을 이루고 있다.
주변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서
통방아, 굴피집, 너와집 등
청정 환경을 체험함과 동시에
잊혀져 가는 옛 삶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대해를 바라보지 않고
서쪽으로 두타산과 태백산을 바라보고 앉아
절벽 아래로 오십천의 물굽이와
조화를 이루는 죽서루는
바다를 중심으로 서 있는 관동팔경과는
남다른 경치를 가진 곳이다.
율곡과 숙종, 정조가
그 아름다움을 칭찬했던 죽서루.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풍스러움이 더해진
누각의 아름다움을
몇 번이고 바라보고 싶어진다.
죽서루는자연 그대로를 살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높다.
누대의 기둥은 모두 17개인데
그 중에 9개는 자연석을 훼손하지 않고
주춧돌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누대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심한 폭풍이 일어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어와 난리가 났다.
이에 허목이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척주동해비를 세웠더니
물난리가 잠잠해 졌다고 한다.
풍랑으로 마멸이 심해
후에 허목의 글씨를 본 따 다시 새긴 것이다.
빼곡히 들어찬 소나무 숲,
넘실대는 바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의 바다가 동해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 중에는
구름 때문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은
구름 저 건너편에서 희망으로 다가온다.
삼척항은 1종항이며 공업항이다.
옛날에는 정라항이라고 불리는
작은 어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인근에 위치한 동해항과 더불어
시멘트 반출의 전진기지이다.
촛대바위는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 해안에
절묘하게 위치해 있는데,
일부러 꽂아 놓은 듯 뾰족하게 솟아있어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강원도 체찰사로 있으면서 추암에 와보고는
그 경승에 취해 "능파대"라 부르기도 했다.
추암하면 사철 어느 때나
기막힌 일출을 보여주는 해돋이가 유명한데
촛대바위 앞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백사장에서 돌섬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만이다..
이번 여행 내내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서
기행팀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1차 여행중에는 첫째날과 마지막날
2차 여행중에는 첫째날과 둘째날
많은 비가 내렸다.
사진은 2차 기행팀의 둘째날 모습이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때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지은 정자이다.
바다를 정원으로 삼은 해암정 뒤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정동진은 한반도의 동해안 중심이며,
서울 경북궁에서 정 동향에 위치한 곳으로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이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정동진역은 '모래시계'로 유명한 곳이다.
주변에는 모래시계공원, 정동진 해돋이공원,
드라마영상관 등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임금이
사해용왕에게 친히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야산으로 둘러쌓인 아늑한 신복사터에는
중후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초의 3층 석탑이 남아 있으며
석탑 앞에는 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의
석불좌상이 있다.
당간은 사찰을 알리는 깃발인 당을 달아두는 장대로서 사찰 입구에 세워진다. 주로 나무나 구리 철 등으로 만들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삭아 없어지고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당간지주이다.
현제까지 확인된 당간지주는 대부분 퉁일신라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굴산사터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이 간결하게 다듬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로서 관리들과 더불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던 곳이다.
이런 기능 때문에 객사는 관아의 형식과 주택의 형식을 절충한 형태로 지어졌고, 중앙에서 오는 관리들을 위한 건물이기 때문에 해당 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졌다.
강릉의 객사문은 작으나마 고려시대의 주심포 건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물로서 아름다운 비례와 구조를 가진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객사는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다 1929년 일제 때 강릉공립보통학교 시설로 이용되면서 헐리고, 지금은 객사문만 남아 있다.
지금은 객사문을 고쳐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경포호는 경포대를 중심으로
호반에 산재한 누정 (경포대, 해운정, 경호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석란정, 창랑정,
취영정, 상영정)과 경포해수욕장 및
주변에 울창한 송림지대를
일괄하여 일컫는다.
옛날에는 둘레가 12km나 됐다고 하나
지금은 4km 정도이다. 『
수면이 거울과 같이 청정하다』해서
경포라 하였다.
강문동 진또배기는
우리나라의 여러 솟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형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오리가
곧 푸드륵 날아오를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장승과 함께
마을 지킴이로 일컬어지는 솟대는
새를 앉힌 장대나 돌기둥을 말하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위하여
동제를 지낼 때 마을 입구에 세우는
신앙의 대상물이다.
방해정은
경포호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에 지은
선교장의 부속 별장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집 앞까지 호수여서
대청마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놀았으며,
배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에
안무사인 박숙정이 방해정 북쪽에 세웠으며,
1508년(조선 중종)에
부사 한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 개 떠오르는데,
하늘에 떠있는 달,
호수에 빠진 달,
바다에 어른거리는 달,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에 잠긴 달,
그리고 벗(님)의 눈동자에 깃든 달이다.
정면 6칸, 측면 5칸에
대청을 받치는 기둥이 28개나 되는
당당한 규모의 경포대는
팔작지붕으로 지은 누대로
관동팔경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경치를 가지고 있다.
제일강산이라는 큰 현판이 그 명성을
뒷받침해 준다.
보물 제183호의 해운정은
조선 중종 25년에 심언광이 지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별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자연석으로 쌓은 나지막한 3단의 축대위에
올라 앉아 있다.
해운정이라는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선교장은 강원도 일대에서 가장 넓은 개인주택으로 조선시대의 상류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주택이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다닌다 하여 배다리마을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장이라는 말도 여기에 기인한다.
선교장은 17세기 초에 효령대군 10대손 이내번이 이 곳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가옥들은 처음부터 계획 하에 건축되기 보다는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었으나, 다른 상류 주택에서 볼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선교장의 솟을 대문인데, 선교유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계단이 없이 경사진 출입구가 특이하다.
선교장의 열화당은
대청, 사랑방, 침방, 누마루가
결합된 사랑채로서
툇마루 앞에는 햇볕을 막도록
차양을 설치하였는데,
개화기에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장식효과도 염두에 둔 장치이다.
선교장의 동별당이다.
원래 동,서 별당이 있었는데,
서 별당은 없어지고 동별당만 남아 있는데, 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안채에 근접하여 지은 생활공간이다.
선교장의 활래정은
건물 일부가 물에 떠있는 형상으로
벽을 온통 문으로 구성하여
개방성을 강조하였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의 집으로,
그 후손에게 물려 오다가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에게,
그리고 신명화는 그의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이율곡의 후손들이 소유하였다.
우리나라의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오죽헌은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다는 데서
이름 붙여진 몽룡실이 대표가 된다.
율곡은 좋은 집안에서 천재로 태어나
인품과 덕성을 고루 갖춘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는데,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몽룡실과 문성사 주변에는
줄기가 검은 오죽이 자라고 있다.
김동명은
강원도 명주 출생의 시인으로
1920년 함흥 영생중학을 졸업한 후에
흥남, 강서 등에서 소학교 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시는 전원적·목가적인 세계에서
점차 정치와
사회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신문·잡지에 정치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다.
그의 대표시 <파초>는
남국을 떠나온 파초와
조국을 잃은 자신의 향수를 융합시켜
읊은 것이다.
사진은 김동명 시비이다.
의상대는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이 676년(문무왕 16)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에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지은 것이다.
동해도립공원의 명승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으로 바닷가 암벽 위
정자에서 맞는 해돋이는
손꼽히는 일출경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원통보전) 뒤쪽의 낙산사 담장은
흙과 기와를 차곡차곡 쌓고
중간 중간에 화강암으로 넣어 쌓아 올렸는데
세조가 낙산사를 고쳐 지을 때,
쌓았다고 한다.
대부분 터만 남아 있어 최근에 보수하였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높이 3.7m
길이 220m의 이 담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동해안을 대표하는 낙산해수욕장은
넓고 깨끗한 백사장과 얕은 수심,
다양한 편의시설, 빽빽이 들어선 송림,
그리고 주위에 자리한
명찰과 고적지로 인하여
많은 관광객 및 피서객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신선이 놀고 갔다는 청간정은
우리 땅 최북단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관동팔경이다.
청간정이라는 이승만의 글씨가 남아 있다.
수십 길 높이에 자리 잡은 정자는
파도가 암석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태백의 준령과 동해가 만나는 이곳에는
신선들이 놀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위치한 관동팔경에서
해오름의 바다 동해를 바라본다.
통일전망대는 남한의 최북단에서
육안으로
북녘과 금강산을 바라볼 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통일의 의지를 다지고
망향과 분단의 설움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는
기념비적인 명소로 알려져
국내외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금강산 1만 2천봉의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낙타봉)과
구선봉 왼쪽 산자락 앞으로 희미하게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을 지닌
감호가 보인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바닷에 점점이 섬들로 이뤄진
해금강이 보인다.
해금강은 해만물상이라고 한다.
쥐바위, 고양이바위, 누룩바위, 동자바위,
서적바위, 상좌바위, 노승바위, 나한바위,
천왕바위 등은
외금강의 본을 따 이름 붙인 것들이다.
설악산은 1965년 11월 5일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70년 3월 24일에는
다섯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설악산일대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생물의 분포 서식지로서
1982년 8월 12일 유네스코에 의해
한국유일의 생물권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케이블카를 타면 쉽게 오를 수 있는 권금성은
정상에 넓은 반석이 있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약2.1Km의 산성이 있다.
전쟁이 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피난한 권씨와 김씨 두 장사가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권금성에 오르면
설악의 아름다운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 (652년)에
왕명을 받고 당나라에서 불법을 닦고 귀국한
자장율사가 건립하고 향성사라 하였다.
그러나 향성사는
효소왕 10년(701년)에 소실되고
앞뜰에 세워진 9층 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지금은 3층 석탑만이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화마에 의한 소실이 거듭되다가
조선 인조 때 재건하고 신흥사라 하였다.
아마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추측되는
신흥사 대웅전 앞의 꼬마(?) 당간지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숫자 팔자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전국 방방곡곡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면 으레 누각과 정자를 세워 자연과 하나됨을 기뻐하고 그 감흥을 시와 노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관동팔경은 정철의 ‘관동별곡’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팔경의 하나로 현재 북한 지역에 있는 총석정, 삼일포와 남한에 있는 청간정,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이 꼽히고 있습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선조들의 고운 심성이 녹아있는 관동팔경. 2004년 여름 역사기행은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관동팔경과 더불어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은 1차와 2차,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엄청난 빗줄기를 헤치고 새벽의 바닷가에 선 답사팀은 구름 낀 어두컴컴한 바다 저 건너편에서 여전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역사에 기억되는 이름 남기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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