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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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시간이 멈춘 곳 경상북도 역사기행 조회수 : 105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4-02-20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고택(청도)

예로부터 밀양 박씨들이 세거해 온 곳이다. 선조 때 박숙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초가이던 집이 점차 기와로 바뀌었고, 점차 규모가 커졌다.

운강 박시묵이 현재의 집을 자었기 때문에 운강고택이라 한다. 1829년의 일이다. 175년 전의 일이다. 1,700평의 대지에 9동 80칸의 대저택이다.

6.25전쟁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운강고택 사랑채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홀 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점잖고 단아한 집이다.

이 건물의 왼쪽에는 내외문있어서 여인들이 사랑채를 피하여 안채로 드나들게 하였고, 오른쪽 사랑채와 중 문간채 사이에 있는 꽃담은 기와 조각을 이용하여 吉자와 간단한 꽃무늬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는 귀갑문 비슷한 기하학적 무늬를 장식했다.



운강고택 사랑채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홀 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점잖고 단아한 집이다.

이 건물의 왼쪽에는 내외문있어서 여인들이 사랑채를 피하여 안채로 드나들게 하였고, 오른쪽 사랑채와 중 문간채 사이에 있는 꽃담은 기와 조각을 이용하여 吉자와 간단한 꽃무늬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는 귀갑문 비슷한 기하학적 무늬를 장식했다.



석빙고(청도)

석빙고는 겨울철에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겨울에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얼음창고이다.

겨울철에 얼음을 갈무리하던 관행은 신라 지증왕(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목빙고에 얼음을 보관하였으나 세종 때부터 석빙고로 바뀌었다.

청도 석빙고는 남한에 남아 있는 6개의 석빙고 중에 축조연대가 가장 빠르다.



얼음만드는 방법


궁궐의 응달진 곳에 움을 파서 돌을 쌓은 후 회를 바른다.

대한이 지난 추운 날을 택하여 물을 한 동이씩 붓는다. 그러면 얼음 덩어리가 된다.

이 얼음은 속이 꽉 찬 얼음이기 때문에 쉽게 녹지 않는다.

얼음을 만드는 것은 사사로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전매제도)



도동서원(달성)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동방오현(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희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한 사람인 김굉필은 서울의 정릉동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의 외가인 현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놀기를 좋아하고, 남의 눈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18세에 박씨와의 혼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후에 학문이 높아 정부의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일어나 무오사화 때 장80대를 맞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감자사화가 일어나자 50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셨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도동서원 수월루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환주문 이 나오는데, 이 문은 갓을 쓴 유생이하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다.



도동서원 중정당
(보물 제350호)


기숙사인 동재(거인재,居仁齋)와 서재(居義齋) 그리고 강학공간으로 이루어진 서원의 중심영역으로 맞배지붕이다.

중정당의 기단은 돌을 각각 다른 크기로 다듬어 조각보처럼 맞추어 아름답다.

 



도동서원 중정당
(보물 제350호)


기숙사인 동재(거인재,居仁齋)와 서재(居義齋) 그리고 강학공간으로 이루어진 서원의 중심영역으로 맞배지붕이다.

중정당의 기단은 돌을 각각 다른 크기로 다듬어 조각보처럼 맞추어 아름답다.

 



도동서원의 사당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축대는
사대부가의 후원처럼 아름답게 꾸몄다.



남평문씨 세거지(달성) 안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인 안흥마을은 사람 사는 집은 윤기가 담장 넘어 골목까지 반짝이는 마을이다.

아무리 가치가 있고 귀한 집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끊기면 찬 바림이 돌고 집의 품격이 떨어지 지만,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훈기가 돌고 윤기가 흘려 집이 돋보인다.

안흥마을은 문익점의 18 세손인 문경호가 내려와 정착한 후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안흥마을의 흙돌담길

같은 집안의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안흥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뻗어있다.



태고정(달성)

규모가 작은 조선 중기의 정자 건물로 대청이 있는 오른 쪽은 팔작지붕, 방과 부엌이 있는 왼쪽은 맞배지붕, 그리고 부섭지붕을 달아 마감하였다.

부섭지붕 -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



육신사(달성)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박일산이 세운 99칸의 종택이 있었다.




육신사에서 다같이

위 - 1차 역사기행팀

아래 - 2차 역사기행팀



묘골(달성)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정부의 고위관직을 두루 거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이다.

박팽년은 세조가 단종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세조의 혹독한 고문으로 박팽년은 죽임을 당하고, 박팽년의 4형제와 아들 3형제가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로 끌려가거나 관비가 되었다. 온 집안이 멸문을 당할 때 대구 관아의 관비로 내려간 둘째 며느리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로 삼으라는 어명을 받게 된다.

해산하니 아들이었는데, 때마침 해산한 여종이 이씨부인과 아이를 바꾸어 기르게 된다. 그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으로 이곳 묘골에 정착 하게 된다.



삼가헌(달성)

박팽년의 11대손 성수가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 하였고, 그의 아들 광석이 묘골에서 이곳으로 분가한 후 초가를 헐고 정침을 지었으며, 하엽정은 광석의 아들 규현에 의해서 지어졌다.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다. - 불의와 타협하지 않음
벼슬과 녹봉을 거절할 수 있다. -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음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삼가헌 중문채

이 집에서 중문채만 초가인데, 사대부 집안에서 청빈함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건축방식을 택하곤 하였다.

사대부란? 중국에서는 그 신분이 천자, 제후, 대부, 사, 서민으로 나뉘었는데, 이중에 천자와 제후는 황제와 왕을 뜻하고,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와 사가 지배계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족이나 벼술아치들을 사대부라 하였고, 그 일족을 사족이라 하였다.



삼가헌 하엽정

삼가헌에서 가장 풍광이 아늑한 곳으로 정자와 연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당은 장방형의 못 가운데 등그런 섬이 있고, 물 위에는 연이 가득하다.
장방형의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원형의 섬을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다.

연못의 연꽃은 불교의 상징으로 심은 것이 아니고, 군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길을 걷기 원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을 못에 연을 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군자란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낙산동 고분군(구미 선산)
(사적336호)

가야시대와 신라시대의 고분이다.
205기의 무덤이 6만7zT천 평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디.
대부분의 고분은 도굴의 피해를 입었고, 후에 효성대학교 박물관팀의 발굴조사로 일부 유물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해평의 낙산동 고분군에 도착했을 무렵 역사 저 건너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쌍암고가(구미 선산)
(중요민속자료 105호)


기름진 해평들은 전주 최씨들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여기에 최상학의 고가가 있다.
이 집은 조선 정조3년에 지어진 집인데, 본래는 사당채, 안채, 안대문채, 사랑채, 대문채, 그리고 부속건물로 이루어 진 조선 후기의 상류가옥이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안대문채, 사랑채, 사당채만 남아 있다.



가산산성 (칠곡)

가산산성은 가산의 골짜기와 능선의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포곡식(골짜기까지 포함하여 축조한 산성)과 태뫼식(모자를 쓴 것처럼 산봉우리를 둘러쌓아 축조한 산성)이 혼합된 산성이다.

이 공사에는 1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공사비가 동원되었으며, 혹독한 공사로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자 이명웅은 물러나고, 그 후 숙종 때 이르러서야 성을 완성하였다.

 



가산산성

도성
한 나라의 도읍을 둘러싼 성을 말한다. 한양성, 평양성, 개성, 왕검성, 반월성(경주), 사비성(부여)등이 있다.

읍성
주요지역의 관가와 민가를 둘러싼 성으로 해미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 수원성, 고령읍성, 진도읍성, 홍주성이 있다.

산성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주로 산지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행주산성,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 부여의 부소산성, 공주 공산성이 있다.

행성(장성)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란과 여진에 대한 대비책으로 압록강 어구에서 동해안 정평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송림사(칠곡)

비교적 평탄하고 널찍한 터에 자리 잡은 송림사는 그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사찰이다.
송림사라는 명칭은 이 자리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송림사 5층전탑
(보물 제189호)

금동제의 상륜부를 갖춘 거대한 탑으로 여러차례의 보수가 있었지만 처음 만들어 졌을 때의 모습을 크게 잃지 않은 탑이다.

전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건축재료로 벽돌을 들겨 사용하는 중국 사람들에 의해서 크게 유행한 탑의 형식인데, 우리나라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유행하지는 못했다.

현존하는 1,500기 이상의 탑이 모두 석탑이고, 전탑은 오직 5기만이 전해진다. 그중 한기가 여주 신륵사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경북지방에 있다.



송림사 대웅전

칸과 칸 사이가 3:2:1의 비율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고, 문짝 12개의 문빗살의 변화도 다양해서 다채로우면서도 점잖은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의 옆면도 앞면처럼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다포와 주심포의 혼합양식으로 꾸며있다.



다부전적기념관(칠곡)

낙동강전선에 형성된 여러 곳의 전장 중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장이 다부동이다. 이곳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국 1개 사단이 1950년 8월부터 한달이 넘도록 피로 얼룩진 전투를 하였고,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되새기기 위해서 1981년에 건립되었다.



다부전적기념관(칠곡)

낙동강전선에 형성된 여러 곳의 전장 중에서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장이 다부동이다. 이곳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국국 1개 사단이 1950년 8월부터 한달이 넘도록 피로 얼룩진 전투를 하였고, 쌍방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되새기기 위해서 1981년에 건립되었다.



옥연정사(안동)

서애 류성룡선생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정자를 짓고자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짓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하여 정자를 짓고 서애 선생에게 선물을 하였다.

이로써 선생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으며, 많은 사람에게 두루 신망을 받고 살았는지를 알 수있다.



옥연정사

옥연은 정사의 앞을 흐르는 강의 깊은 곳이 깊고 맑아서 서애선생이 이름하였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겸암정사(안동)

하회에서 강 건너 있는 부용대의 오른 쪽 아래 자리잡은 정자이다. 겸암 류운룡이 26세 때 짓고 머물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현판 중 앞의 것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하회마을 남촌댁
(중요민속자료 제90호)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저택이었으나 1954년에 불타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사랑채만 남아 있다.

별당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회마을 양진당
(보물 306호)

풍산류씨의 대종택이며 겸암 류운룡의 종가이다. 흔치 않은 조선 전기의 주택으로 하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남향을 하고 있다.



하회마을 충효당
(보물 414호)

서예 류성룡의 종가로 남촌을 대표하는 건물이다.평생을 청렴하게 사신 서애 류성룡이 삼간초옥에서 별세한 후 선생의 문하생들과 사람들이 선생의 손자인 유원지를 도와 건립하였다.

본래는 단출한 살림집이던 것을 후손들이 조금씩 중축하여 지금처럼 대규모의 건축물이 되었다.



하회마을의 흙담길

하회마을의 길들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삼신당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어 있는데 거의 흙담이다. 이는 하회마을이 배 모양이라 돌담을 쌓으면 가라앉는 다하여 흙담을 쌓은 것이다.



하회마을 류지주가옥
(중요민속자료 87호)

양진당과 충효당 만큼은 아니어도 담을 낮게하고 기단을 높게하여 밖에서 마음을 먹으면 집 안의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하회의 집들이 폐쇄적인 반면에 이 집은 개방성이 진하다.



하회마을 만송정

소나무가 만여 그루나 우거져 있어서 만송정이라고 하는 이곳은 겸암 유운룡 선생이 조성한 풍치림이다. 기록상으로는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병산서원(안동)
(사적 제260호)

서예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으로 서원의 기본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서원이다.



병산서원 입교당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을 가진 강당으로 서원의 핵심건물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입교당에서 내려다 본 서원의 전경

대청마루에 서면 만대루가 눈앞에 길게 펼쳐지고, 지붕위로는 병산과 하늘이, 누각과 기둥사이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병산서원 만대루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한 누마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병산이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삼구정(안동)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

화산 김세경이 88세 된 노모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쉬시도록 지은 정자이다. 정자 앞에는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마치 그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하여 삼구정이라 하였다.



신세동 7층전탑(안동)
(국보 제16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으로 전체높이가 17m에 이른다. 상륜부는 금동제로 장식되었고, 기단도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으나, 후대에 크게 훼손되었다.



임청각(안동)
(중요민속자료 제185호)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은 멀리서 보아도 규모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이 안동으로 내려와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독립운동으로 온 집안이 풍비박살이 난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이다.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는데,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반 이상을 허물어 버렸고,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

임청각의 구조는 남여와 계층별 위계질서가 매우 뚜렷한 구분을 이루고 있다. 양반 남자들의 공간이 사랑채, 양반 여자들의 공간이 안채, 여자 노비들의 공간이 안행랑채, 남자노비들의 공간이 바깥 행랑채로 되어 있는 用자구조의 특이한 평면을 하고 있다.



동부동 모전탑(안동)
(보물 제56호)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전탑이다. 원래는 7층이었다고 하나 언제 5층탑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륜부는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



운흥동 당간지주(안동)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00호)

높이 2.6m의 간결하고 소박한 당간지주이다. 지주 꼭대기의 일부는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다.



봉정사(안동)

의상이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앉은 자리에 자리하였다고 전해지는 봉정사는 산들에 둘러싸여 더 없이 아늑하다.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15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72년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할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363년 지붕을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보다 약 150~200년을 앞서서 건축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이다.



봉정사 대웅전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가장 오래 된 건축물이다.



도산서원(안동)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

이곳은 퇴계가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인데, 퇴계가 죽은 후 서당의 뒤쪽에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발전시켰다.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도를 보면 예전에는 낙동강을 따라난 길로 서원을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안동댐의 물속에 잠겨 옛길을 찾을 길이 없다.



도산서당

퇴계가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평범한 3칸 집이다.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도산서원 농운정사(기숙사)

일반건축에서는 꺼리는 工자형의 대칭적인 건축물로 도산서당에서 겅부하던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것은 工夫에 전념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농운정사 방들의 창과 문

좌우 대칭적인 건물에 비하여 창과 문은 굳이 대칭이 아니어서 자유로워 보인다.



도산서원 전교당
(보물 제210호)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르게 매우 소박한 건물이지만 넢은 기단위에 앉아 위엄이 있다.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은 선조의 명을 받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마루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며, 온돌방은 훈도(사감선생님)의 방이다.



도산서원 동서광명실(서고)

이곳에는 907종의 4,338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는데,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왕이 내려준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은 이처럼 유생들을 가르치는 기능 외에 도서관의 역할도 했으며, 보관하는 책을 바탕으로 책을 역어내는 출판사의 구실도 했다.



도산서원 고직사

이곳은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던 곳으로 서원에서 쓸 물건을 보관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육사생가터(안동)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

육사 이활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도산에서 태어나 온몸을 바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일한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그는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진다.



퇴계 묘소(안동)

몇 개의 석물로 구성된 소박한 묘소이다. 묘서에서 내려다보면 앞이 탁 트여 있으면서도 주변의 나무 들이 감싸 안아 포근하다.



퇴계종택(안동)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도산면 일대는 퇴계를 배출한 진성 이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진성 이씨는 조선시대의 명문 사대부인데, 퇴계를 중심으로 과거급제가가 58명, 문집을 남긴 학자가 50명이나 되는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긴다.

퇴계 종택은 전형적인 경북지방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퇴계란 종택의 앞을 흐르는 내를 말하고, 도산은 종택의 뒤에 있는 산이다.



퇴계종택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퇴계태실(안동)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0호)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굶어 쓰러진 스님을 구해주었는데, 그 스님이 터를 잡아 주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히 된다”고 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계양의 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이황이다.

태실은 안채 가운데서 불쑥 나와 있다.



닭실마을(봉화)
(사적 및 명승 3호)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닭실마을이라 한 이 곳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경주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라고 한 곳이다.

조선 중기의 인재인 충재 권벌의 5대조가 안동에 옮겨와 자리를 잡은 곳이지만 권벌 이래로 매우 번창하였다



부석사(영주)

부석사는 삼국통일기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후삼국 때 궁예가 부석사에 쳐 들어와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친 일은 유명하다.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부석사 의 가람배치과 길을 華(빛날 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화엄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부석사가 창건된 때는 오랜 전쟁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시대였다. 의상은 시대의 아픔을 포용하고 새로운 신라를 열 사명을 부석사를 통해서 이루어내려고 하였다.



대석단 석축의 일부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아홉 단의 석축을 올라야 한다. 부석사의 적축은 극락세계를 이루는 구품 만다라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의 형태를 다치지 않게 쌓으면서 틈 사이에 잔돌을 넣어 절묘하게 엇물려 힘을 받도록 하였다.



부석사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영역을 이룬다.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아래서 보면 대석단과 함께 어울려 위세가 있다.



부석사 대웅전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건축사적인 의미나 건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358년이 왜구의 침노로 불탄 것을 1376년에 중수하였으니, 봉정사의 극락전과 나이를 다툴 만 하다.



부석사 석등
(국보 제17호)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화창 사이사이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수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양보살상이 새겨있다.



부석사 3층석탑
(보물 제249호)

탑은 법당 앞에 자리잡는 것이 원칙인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특이하게 무량수전의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과 함께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자태가 늘씬하고 수려한 당간지주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안정감도 느껴진다.



부석

의상대사가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을 때 방해하는 무리가 있자 선묘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선묘는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할 때 머물렀던 집의 딸인데 의상을 사모하다 듯을 이루지 못하자 불가에 귀의한 여자이다.



청다리(풍기)

주세붕 선생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그만 둔 학자와 청년들이 많이 모여서 학문과 덕을 닦았다. 한편 이곳에는 숲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아 주위에서 이 곳의 경치를 따를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학자와 청년들은 이 곳이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이었으므로 때때로 기생을 불러서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서로 놀다가 정이 들어 사생아를 낳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이러한 사생아를 기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생아들을 죽계수 위에 놓인 청다리 밑에다 버렸다.

당시에 자식이 없고 후손이 귀한 집에서는 이러한 아이를 많이 주워다 길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어린이들을 달랠때에 "너는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너의 어머니는 청다리 밑에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다"라고 한다.



금성단(풍기)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처를 떠돌다가 이것에 귀양오게 되었는데, 그때 단종은 태백산 건녀편 청령포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때 금성대군은 단종의 복위운동을 꾀하여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를 모으고, 격문을 돌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그 때 금성대군을 동조하던 선비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 죽계천이 붉게 물들어 40리를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동촌리 일대는 ‘피끝’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금성단은 단종이 복위된 뒤인 숙종 37년에 순흥부사 이명희가 왕의 운허를 얻어 설치 했는데, 모두 3단으로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순흥부사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을 모시고,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낸다.



소수서원(풍기)
(사적 제55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풍기현감 주세붕이 고려의 명신이며 학자인 문성공 안향을 제사지내기 위해 영주시 순흥에 세운 서원으로 다음해에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를 추가로 배향하고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가 명종 5년(1550년)에 퇴계가 풍기 현감으로 부임하여 상주함으로써 '소수서원'이라는 임금이 내린 사액을 받아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소수서원의 명륜당

서원의 중심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이다.

소수서원은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없이 자유롭게 지어졌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시시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보니 일정한 서원건축의 규칙이 정해지기 전에 필요에 따라서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죽계천과 취한대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서원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지었는데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면서 휴식하던 곳이다.



소수서원 학구재와 지락재

일신재와 직방재와 같이 선비들의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매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소수서원 일신재와 직방재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 현판은 둘이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



읍내리 벽화고분(풍기)

고구려의 고분으로 한강 이남에 있는 유일한 고분으로 약 500년경에 만들어진 고분이다.

이 지역이 대륙의 문화를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신라로 전달되는 길목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읍내리 고분의 벽화

동쪽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고(삼족오라고도 함) 남쪽에는 글씨와 물고기 모양의 기를 들고 있는 사람, 북쪽에는 산과 새와 흐르는 구름과 활짝 핀 연꽃, 서쪽에는 부채를 든 여자와 담으로 둘러쌓인 집안의 버드나무가 그려있다.



1차 기행팀 여행을 마치고...

남자 어린이
이재현 최가람 차한 김유신 김민경 정재우
원종인 차결 최현석 이성진 박준형 서종근

여자 어린이
박민지 박다은 최윤경 임예은 김기연 권수현
강세현 이다송 선주영 박예슬 최소민 김지현



2차기행팀 여행을 마치고...

남자 어린이
윤다함 박용재 전은표 허명현 장재민 박민서
예준희 김상진 이규호 윤다찬 이동규 이석현
신정섭 김현웅 김태우 문종환

여자 어린이
박승아 이하정 추소라 이지현 권기은 이민주
신민서 김예린 신새벽 김지언 박지원



2004년 겨울 역사기행은
경상북도지역을 답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문화
그리고
진한 역사의 향기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지난여름과 마찬가지로
1차와 2차에 걸쳐서
52명의 어린이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 땅을 돌아들며
오천년 역사를 만난지가
벌써 8년째.
새벽닭도 울기 전에 일어나
종일 유적지들을 더듬어 다니다가
이미 해가진 도로를 달리며
숙소를 찾아 헤매는 어려운 여행이지만
힘든 만큼 큰 보람을 느끼는
그런 여행입니다.
이번 여행에도 함께한 어린이들과
여행기간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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