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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과의 약속이 더 중요했던 하워드 장군 |
조회수 : 3466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4-09-26 |
하나님과의 약속이 더 중요했던 하워드 장군 Howard, Oliver Otis
1867년 3월2일 미국 의회가 하워드대학교의 설립을 인가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이 대학은 사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결의에 따라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1865년에 끝난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을 위해 세워진 첫 번째 고등교육기관은 1866년에 수업을 시작한 테네시주 내슈빌의 피스크대학이지만, 하워드대학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세워졌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하워드대학은 그 뒤 결성된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와 함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세력화하는 두 구심점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워드대학교라는 교명은 남북전쟁의 영웅 가운데 하나로 이 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을 주도한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워드는 1869년 4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이 대학의 제3대 총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이 대학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흑인의 권익을 위해 설립된 대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이사회는 하워드와 초대 총장 찰스 보인턴을 포함해 18명 전원이 백인이었고, 남성인 이사로 구성되었다. 흑인 이사들은 학교 설립 직후부터 선출되기 시작했지만, 여성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뒤인 1924년 새러 브라운이 이사 로 선출된 뒤부터였다.
1867년 5월 학생 네 명이 등록을 해 첫 수업을 시작한 하워드대학은 다음 학기에 94명의 등록을 받았고, 개교 7년 뒤에는 신학과, 의학과, 법학과를 포함해 11개 학과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하워드대학교는 전임 교원 1,300여명과 학부ㆍ대학원을 합쳐 1만 여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이 대학을 거쳐 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다수가 중산층에 진입한 덕에 하워드라는 이름은 흑인 중산층화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백인 학생들도 대학원 과정을 중심으로 하워드 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워드가 장군시절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환영 만찬회에 대통령도 참석하니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날 다른 분과 약속이 있으므로 목요일 저녁으로 연기해 주면 좋겠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주님께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와 수요일 예배는 꼭 참석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환영회는 목요일로 바뀌었다.
요즘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고 저녁 예배와 수요 예배는 참 석치 못하는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신앙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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