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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만유인력을 발견한 신앙인 뉴턴 조회수 : 2522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4-09-19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한 뉴턴은 수학에서의 미적분법을 창시하였고,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한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은 출생도 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수학자 <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16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1664부터 1666년까지 유럽전역에서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만유인력 발견의 계기가 된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1667년에 다시 대학에 돌아와 펠로(특별연구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669년 <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 교수직에 부임하였다.
한편 망원경 연구와 제작에도 몰두하여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는데,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에 크게 공헌하여, 그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역학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문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 설명하여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기사)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기도 하였는데, “성경의 신앙보다 더 훌륭하게 입증되는 과학은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과학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거액을 헌금하였고, 런던 지역에 50여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그는 그가 남긴 과학적 연구를 담은 <원리>(Principle)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였다. “태양, 행성, 그리고 혜성들의 가장 아름다운 체계는 지적이고 능력있는 존재의 계획과 통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분은 만유의 주로서 우주를 다스리신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싱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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