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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충북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한 F.S.밀러 조회수 : 3262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6-26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충청북도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한 F.S.밀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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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Miller)라는 이름(성)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여러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프레드릭 S. 밀러선교사이다. 그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민로아라는 한국 이름으로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두 번째는 휴 밀러선교사인데, 그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민휴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세 번째, 에드워드 H. 밀러 선교사는 190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밀의두라는 한국 이름으로 경신학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서교동교회 등에서 교역자로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한 선교사이다. 이밖에 한국에서 활동한 밀러 선교사는 더 있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다. 안나 밀러는 1892년 11월 15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1903년 3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밀러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는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 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또한 그들의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 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프레드릭 S. 밀러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11월 15일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의 연합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에는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 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와 재혼하였으며,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는 충북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던 중 1936년 은퇴하여, 개인적인 선교여행을 하였으며, 1937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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