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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성교육으로 주님을 기쁘게 한 페인(Paine)선교사 |
조회수 : 2976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6-26 |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여성교육으로 주님을 기쁘게 한 페인(Paine)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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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상업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할 때, 한국에서 귀국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로 지원한 <조세핀 O. 페인>선교사는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에 소속된 여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공부한 후, 1893년에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간 여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그녀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첫째, 1899년에 한국 최초로 생리학교과서를 프라이와 공동으로 저술했는데, 인체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및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이다. 생리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전에 인체의 기능에 관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둘째, 1904년 9월에는 중등과정을 설치하여 교과과정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은 배워야 나라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교육열이 점차 높아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나 학생들의 연령, 지식수준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 때 페인은 산수 등의 기존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도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여성은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온몸을 흔들어대는 체육운동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그래서 양반층이 크게 반발하여 “집안의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
셋째, 학생 수의 증가로 1900년에는 정동에 2층 양옥으로 본관을 건축했는데, 이 서양식 건물은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부하는 교실과 생활하는 기숙사가 함께 있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했으며, 페인 선교사가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 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 가마를 타고 경호원을 앞세웠다.
넷째. 학생을 보호하고 신앙을 통한 기도회 등으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운동을 지원했는데,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소녀들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페인선교사는 1907년에 이화학당장 자리를 프라이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하던 중 콜레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가 4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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