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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 스톡스선교사 가족 조회수 : 3161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7-06-11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 스톡스선교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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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미국 캐롤라이나에서 출생한 찰스 D. 스톡스(한국명:도익서)는 에즈배리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한국 감리교회 역사,”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1885 -1930)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1947)를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행적 등에 관한 중요한 감리교 역사 자료가 되었다.

1940년 부인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바 있으나 얼마 후 일제의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되돌아갔다가 1947년 11월에 미국 연합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스톡스선교사는 6·25 전쟁 때에 피난민 구호사업에 힘썼으며, 1952년에는 충북 음성에서 전쟁고아의 구제를 위한 고아원을 설립, 운영했다. 1954년 대전에서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1955년 목원대학을 설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했다. 호수돈여학교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1983까지 40여년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목원대 교수 겸 이사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감리교 교역자를 많이 배출하는 공적을 남기고 은퇴하였다.

김흥수 교수(목원대, 한국기독교역사학회장)는 “검소한 생활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고, 불굴의 의지로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였다”고 증언했다. 1997년 1월 10일 82세로 미국 앨라배마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아내인 아레네 A.스톡스(한국명:도애련)는 남편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활동하던 중 일제의 추방령에 의하여 선교활동도 제대로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후 한국으로 돌아와 피난민 구호사업에 전력하며 대전에서 1966년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심장암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26년간 선교 활동하면서 남편의 선교사업을 내조하고, 구제사업 등에 공헌하였다.

도익서의 아버지인 마리온 B. 스톡스는 1907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개성에서 대부흥운동에 참여했다. 전도활동을 전개하면서 서울로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전도를 했다. 1919년에는 춘천지방에서 선교하면서 월간지 “世光”을 발행하였다.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1925년 9월, 서울에 상설 중앙전도관을 설치하고, 관장으로 취임하여 조직적인 전도와 부흥운동에 진력했다. 조선주일학교 연합회장에 선임(1934)되었으며, 1935년에는 초교파적인 신앙 잡지 "성화"의 창간 및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였으며, 추발된 후에도 다른 국가에서 선교사로 7년간 활동하다가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의 한국어 통역으로 종군했다. 1968년 7월 7일 미국 북 캐롤라이나 챠로트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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