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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창자, 크램선교사 가족 |
조회수 : 3114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6-11 |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창자, 크램선교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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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선각자이며 대표적 주창자라 할 수 있는 하디, 저다인, 크램 등 세 선교사의 가족 묘지가 있다.
캐나다 출신의 하디(Hardie)선교사의 딸로 단 하루를 살다가 사망한 매리,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 마가렛 등 두 딸의 묘가 있고, 단 하루를 살고 양화진에 묻힌, 미국 남 감리회 출신 저다인(Gerdine) 선교사 아들 조셉의 묘가 있다. 또한 크램(Cram) 선교사의 아들 뉴톤도 두 살 밖에 살지 못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이들 모두는 복음을 전하며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귀한 자녀로 한국의 기후 풍토와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숨진 영혼들이다. 양화진 묘역을 방문하는 이가 수없이 많지만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여 헌화하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크램 선교사 부부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어린 아들을 양화진에 묻으면서까지 한국의 대 부흥운동을 주창했다.
W. G. 크램은 미국 켄터키주 도우튼에서 출생하여, 애즈베리 대학을 졸업하고, 1902년 11월 미국 남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철원 금화 금성구역 감리사로 농촌전도에 힘썼다. 특히 개성은 원산에 이어 대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크램 선교사가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박명수의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에 따르면 크램 등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으며, 한국 부흥운동의 주요한 특징은 죄의 자각, 회개, 그리스도의 보혈, 마음의 청결, 성령의 능력과 충만,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순종한 결과인 평화와 기쁨 등으로 전형적인 성결 부흥운동이라고 했다.
크램은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제9대(1905.9) 및 제20대(1916.9.13) 연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06년, 구약 성서의 번역이 본격화 될 때 성서번역위원으로 위촉되었으나, 열성적인 전도 활동으로 인하여 성서 번역에 전념 할 수 없어 몇 개월 후 사임했다.
1912년 6월 YMCA 학생수련회 때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여 경건과 기도의 모습이 새벽이나 밤중에도 무릎 꿇고 기도하는 뜨거운 분위기의 대세를 이끄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15년 12월 8일 창간된 기독신보의 편집인으로 문서 선교분야에서도 활동했으며, 1917년 1월부터 1919년 4월까지는 코리아 매거진을 월간으로 발행하여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후 크램은 미국으로 돌아가 남 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후원했다. 이 기간 중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합동할 때 선교본부를 대표하여 내한한 일도 있다. 그는 1969년 10월 29일, 94세로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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