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보기
제 목 : 노다지 금광과 우리나라 무역의 개척자 테일러 가문 |
조회수 : 3374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5-05 |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노다지 금광과 우리나라 무역의 개척자 테일러 가문
************************************************************************************************
버지니아와 알라스카에서 금을 채굴한 경력이 있는 조지 A. 테일러(1829-1908)는 1896년 11월, 67세의 고령으로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제임스 모스와 동업자 레이 헌트의 금광에 한국 최초의 채금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서 내한했다.
이 금광은 1896년 미국무역회사가 채광권을 허가받아 동양연합광산회사에 승계하였다. 이 광산은 너무 많은 금이 생산되어 일명 "노다지"로 불려졌다. 노다지란 말의 유래는 "운산금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금을 찾아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자, "노터치(No touch)"라는 접근 금지 경고판을 써 놓았는데, 이 표시를 금이 많이 나오는 상징으로 오인하여 "노터치"가 "노다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광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1910년까지 채광권이 보호되었고, 그 후 총독부도 개입하지 않아 1939년까지 미국인 광산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조지 테일러는 이 광산에 종사하면서 한국 무역업의 기반을 구축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한국 광산의 개척자", 그리고 “Master, the long, long shift is o"er, I have earned it Res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테일러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과 함께 서울 소공동에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으며, 쉐퍼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 서금순의 증언에 의하면 “아직도 방음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영국출신의 연극배우로 일본과 상하이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연극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W. 테일러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고,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였고,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양화진에 앨버트 W. 테일러의 묘비를 세우려고 준비 중에 있다.
미국 헐리우드에서는 "광산과 무역의 개척자" 테일러가문을 소재로 영화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