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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양화진과 절두산, 선교사 묘지의 역사에 대하여 ② 조회수 : 313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6-05-07
근대사에서 양화진은 피로 얼룩진 역사를 담은 것이지만 예로부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중국에까지 이름난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정부 고관들도 한강에 배를 띄워 용산 마포 일대를 지나다 잠두봉 앞에 이르면 그 봉우리에 올라가 하루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한편 양화진은 인천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해상 통로의 전진기지로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거점기지로 활용되었다.

이같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외국 선교사로 내한한 언더우드, 밀러목사, 에비슨박사는 양화진 언덕의 땅을 미화 75불에 구입하여 이곳에 각각 그들의 여름 별장을 지은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성서를 번역하고 봉사자들을 접견하였으며, 휴식 시간에는 동네 아이들과 수영도 함께 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한강에서 배를 타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찬송도 부르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다음은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의 기록이다.

"언더우드는 한강변에 있는 언덕 위에 여름 별장을 지을 만한 아주 아름다운 장소를 살 기회를 얻게 되였다. 75달러 밖에 하지 않아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싼값이었다. 그는 이곳을 에비슨 박사, F. S. 밀러 목사와 함께 구입하여 각각 작은 방갈로를 지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수년간의 여름 동안 한양에서 경험한 비위생적인 환경으로부터 피난할 장소를 얻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오두막에서 많은 일꾼들을 접견하였으며, 여름 내내 성경을 번역할 수도 있었는데, 새벽 일직 일어나서 오후 4~5시까지 일을 하였다. 그 다음은 아이들을 데리고 강으로 미역을 감으러 갔다. 그리고 나서는 모두 현관이나 가까운 절벽 부근의 아름다운 곳에 모여 차와 생강 빵이나 과자를 먹었다. 저녁에는 낚시 배를 빌려 모든 가족들과 친구들이 덮을 것과 바이올린 등을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양화진 일대에 선교사 묘지가 조성된 것은 고종황제의 시의였던 존 헤론 박사의 죽음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이며, 동시에 고종의 시의였던 존 헤론이 급환으로 별세하자 묘지선정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시 도성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그렇다고 1883년에 인천항 해안 언덕에 마련된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 여름 더위에 서울에서 인천까지 시신을 운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유족과 선교사들은 조정에 서울 가까이 묘지로 쓸만한 장소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지정해 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 기슭 모래밭이어서 묘지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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