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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양화진과 절두산, 선교사 묘지의 역사에 대하여 ① |
조회수 : 3084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6-05-07 |
양화진에 인접한 한강 연안과 잠두봉은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중국의 적벽이나 다름없는 경승지라 하여 중국의 사신을 비롯하여, 풍류객들이 자주 머물던 곳이었다. 그리고 인접하여있는 망원정은 세종 임금의 형 효령대군과, 성종 임금의 형 월산대군이 머물던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곳이었으며, 연산군은 이곳을 다시 꾸며 놀이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양화진은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나루터의 구실뿐만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양화진은 수도 방위를 위하여 한강 연안에 설치한 군사기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양화진은 구한말에 이르러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의 목을 잘랐기 때문에 절두산이란 이름의 사형장으로 변하게 된 수난사건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3년에 천주교에 대하여 모진 박해가 가해져 서소문과 새남터에서 9명의 신부가 순교하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신부의 고발로 텐진에 주둔하던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한강으로 올라왔다. 이때 리델 신부와 3명의 천주교 신자도 이 배에 동승하여 통역과 안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9월26일 양화진에 이르렀으며, 군함 한 척은 서강까지 올라왔다. 프랑스 함대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수많은 쪽배와 뗏목의 저지를 받았으나 그들은 대포 한방으로 간단히 물리치고 수심과 조수를 세밀히 조사하면서 유유히 올라왔다.
프랑스 함대는 24시간 양화진에 정박하여 측량도 하고 주위의 반응을 살피는 행동을 하였으나 조선 군대는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고, 프랑스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이때 대원군은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까지 온 것을 물리치지 못한 치욕과 한을 풀기 위하여 이를 갈았다. 그는 "오랑캐가 머물러 있던 자리를 깨끗이 씻어야 할 텐데 그것을 한강 물로 씻기는 물이 너무 아깝다. 차라리 그 자리는 오랑캐를 끌어드린 천주교도의 피로 씻으리라"하면서 양화진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화진은 절두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양화진은 한국의 개화를 외치며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시신을 효수형에 처한 형장으로 우리나라 비극의 역사 현장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양화진에 인접한 절두산이란 이름은 원래 덜머리 또는 잠두봉이라고 하였다. 봉우리의 생긴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또 봉우리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두봉이라고도 하였고, 예로부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중국에까지 이름난 곳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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