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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 죠지 휫필드 ③ |
조회수 : 312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6-04-23 |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 죠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③
그는 일곱 차례나 미국여행을 하였고, 귀족 출신인 웨슬리가 식민지 백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지에서 돌아올 때 휫필드는 바닥에서 생활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섬겼다.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그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무리들이 일어나서 그의 사역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런던의 교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브리스톨과 글로스터에서는 그의 설교를 통해 부흥의 불길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많은 교회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에 휫필드는 예수님이나 웨슬리처럼 야외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1789년 2월, 킹스우드의 석탄광부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나왔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739년 3월 25일에는 주일에 2만 3천 가량이 모일 정도였다.
그리고 브리스톨에서 50명으로 시작한 젊은이들 모임은 6주 만에 500명으로 늘어났으며, 급기야는 3만 가량이 몰려들었다. 휫필드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 전 웨슬리에게 자신의 사역을 모두 맡겼는데, 이후 웨슬리형제가 형제가 영국 각성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미국은 각 지역에서 우후죽순처럼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 데, 휫필드는 이들을 함께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조내단 에드워드등의 사역자들은 휫필드를 정중하게 초청했고, 78,000가량의 군중이 말씀을 들으러 나왔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휫필드의 목소리가 야외에서 약 3만 명이 둘을 수 있을 정도로 전달력이 있으며,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말했다.
그는 꽉 찬 스케줄로 미국전역을 설교하였는데, 그 대상도 장로교회, 회중교회, 연합교회, 가톨릭, 퀘이커 교도, 그리고 모라비안에게도 설교를 하였다. 그는 종파의 벽을 뛰어넘어 미국 개척자들의 동일한 신앙경험을 갖도록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휫필드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설교를 듣기 전에는 지독히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으나 경건하고 정직한 사람들로 변화되어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되었다.
1770년 그는 뉴햄프셔의 야외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저는 갑니다. 저를 위해 준비된 안식처로 갑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그리스도를 설교하다 그와 함께 죽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임종하였다. 그는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 받은 하나님나라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로 헌신하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의 꿈은 온 세상을 주님의 빛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어두운 세계를 향하여 영적인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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