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보기
제 목 : 한 알의 밀알처럼 산 믿음의 사람, 주기철목사 ① |
조회수 : 3104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6-01-29 |
주기철목사가 살았던 시대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통치하는 어두운 시대였다. 이때 젊은이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것이 자기들의 해야 할 사명임을 느꼈고, 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시대의 지도자를 양성하며, 물산 장려운동으로 민족경제를 살리고자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 익히기만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서양종교인 기독교가 물결처럼 밀려 들어와 우리 사회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시대 가운데 신앙의 지조를 지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기철목사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기철목사는 1897년에 경상도 웅천에서 둘째 부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이복형제와 사촌들 사이에서 따돌림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워낙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오히려 형제들을 융합시키는 다리역할을 할 정도였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했고, 보통학교 시절 춘원 이광수의 영향으로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특히 남강 이승훈장로와 고당 조만식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105인 사건과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남강이 "주여, 이때까지 이기고 오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그와 같이 이후도 이기고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일제 저항이 무엇을 뜻하며,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다.
20세에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지만 서울의 분위기가 낯선데다가 부패한 도시습성과 간교한 일본인들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산학교 졸업 무렵부터 악화된 유전성 눈병이 악화되어 신경이 전부 눈으로 쏠렸고, 재산 상속문제로 집안에 불화까지 생겼다. 이복형제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과 질시가 재산분배 문제에 얽혀 견딜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별거로 실낱같이 이어진 형제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는 등 모든 것이 심란해진 그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로 인해 그는 청년운동과 교회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열정을 보이며, 내면 깊이 잠재된 자기세계를 표현하고 좌절과 방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목사님의 중매로 결혼하였다. 그런데 장모인 안 부인의 신앙은 아주 뜨거워서 그를 목회자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기도하고 권유하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