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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제의 교회탄압 |
조회수 : 2742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사실 한일 합병의 비극을 가장 처절하게 체험하고 지나간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한일 합병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다할 민족적 기관이나 국민적 연결체가 없었지만, 그래도 교회가 남아서 유일하고도 강력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합병되자마자 이러한 교회의 바탕을 제거하고 조선인의 정신에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근절을 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군인출신의 데라우찌의 “시정강령”, “조선 상하 민중에의 유고” 중에 교회를 탄압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제 종교가운데 신교(기독교)가 가장 문제라고 판단하고 이들 때문에 비국민의 오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
사실 이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 경술국치의 모진 격동속에서 교회의 일을 하기로 한 이동휘 전 보병 참령은 함경북도에서 전도사의 일을 보고 있었는데, 2년의 기간을 두고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병력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전도사의 일을 하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교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데라우찌의 반 기독교 정책은 학교에서 일본 천황의 사진에 대한 경례의 강요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이 의식을 우상숭배라고 거부했을 때부터 일본은 기독교계통의 학교를 시찰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탄압과 근절의 책략은 일관된 패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일본은 중앙 복음전도관이라는 것을 여기저기 세워서 기독교회의 복음사업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힘으로는 기독교를 막을 수 없게 되자 이단적인 기독교를 만들어서 교회의 복음사업을 방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일본은 공자교를 세워보기도 하고, 청일전쟁 때 친일성을 보인 천도교의 손병희를 통해 천도교를 강화해서 종파로서 기독교를 대체하려는 교회말살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손병희야말로 후에 입증된 것처럼 항일의 거장이었기 때문에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일제는 무차별적인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박멸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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