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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십자가를 걸머지는 한국교회 |
조회수 : 2595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한일 합병전야의 사건들은 마치 기울어지는 석양을 막을 수 없듯이 불가항력적인 쓸쓸한 투쟁이었다. 평양에서는 서우학회 청년회와 자강회 및 상업중의소가 교회의 영향 아래서 항일의 열을 북돋우었으며, 때마침 안창호는 평안도 관찰사인 이시영과 협력하여 교회당에서 만나서 결의하기를 “나라의 독립과 보호를 청하려면 오직 하나님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캘리포니아에서도 기독교 신민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에 전덕기목사, 이동휘, 이갑, 길레트선교사등이 참여하였다.
지금까지는 일본에 동조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친일적인 자세를 수정하였는데, 헐버트가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국제 열강이 조선 병합의 비운을 저지하도록 간섭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평양의 매쿤은 학생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훈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기독교회나 그 계통의 학교에서는 ‘군병’을 이미지로 한 찬송가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격화된 일부 교인들은 일제 침략의 원흉들을 단죄하기도 하였는데, 한때 의병장을 지내기도 하였던 카톨릭교인 안중근은 정당하게 군사를 이끌고 싸울 힘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1909년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합병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순국의 충절을 다하였다. 그는 다음 해 3월25일 장남을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여순 감옥의 사형대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일제의 마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08년 8월에는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계의 학교를 통솔 감독하면서 그 활동을 저지하였는데, 학교를 통해서 이 민족의 계몽과 발전과 선교에 주력하던 기독교의 타격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수탈되고 말았다. 그것은 십여 년 동안 이끌어온 조직적인 일본 침략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조선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비탄에 젖은 눈물을 흘렸다. 런던의 장로교 신문은 “찬란한 문화와 미덕의 나라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고 하였고, 게일 선교사는 “한국, 그것은 사라졌는가?”라는 기사를 세계에 전송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직적으로 민족독립을 위해서 헌신하는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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