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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제의 교회탄압 - 105인 사건 - 1 |
조회수 : 3276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일제의 교회탄압 - 105인 사건
105인 사건 이전에 ‘안악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신민회와 교회의 세력을 망라한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이 지역의 교세를 뿌리 뽑고자 꾸민 일제의 참극이었다. 안중근의 동생인 안명근이 좋은 구실을 일제에게 주었는데, 독립운동 자금의 밀반출과 관계되어 체포된 그와 연루되어 김구 최명식 이승철 도인권 등을 비롯하여 교계인사와 지식층을 비롯한 160여명이 검속되었다. 이중 감리교 목사 도인권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1915년을 전후하여 출옥되었지만 이것은 사실 무근의 음모였다. 이 사건은 그 후 교회가 희생되기 시작한 숱한 핍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황해도 안악에서의 민족주의와 신문화 말살 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이번에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말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은 이 땅을 통치하는데 방해가 되는 선교사들을 추방해서 조선 통치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조선 총독 데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선천역에서 잠시 하차하였을 때 선교사 매큔이 총독과 악수하는 것을 암호로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구실로 평안도 지방의 유수한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10월부터 겨울까지 체포된 자의 수는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157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목사를 비롯하여 김근영 정희순 한필호는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최광옥은 병사했으며 23명을 성방되었으나 나머지 123명은 1912년 6월2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중에 기독교인의 수는 105명에 이르고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선천과 정주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들이 재판정에 나가 섰을 때 세계가 놀라서 “여기에 범죄인의 얼굴은 하나도 없다”고 기고하였다. 한 목격자는 “그들은 한결같이 고상한 인품과 성실한 생활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고 말하였다.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유동렬 이명룡 길진형 양진택 등의 사람들에게서 범죄자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재판의 진행은 실로 가관이었다. 이른바 증거물로 제출된 유일한 근거인 공술서는 견딜 수 없는 고문에 못 이겨 쓰여지게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사건 자체가 완전히 날조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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