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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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교회의 조직 조회수 : 2716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3-03-22
부흥의 뷸길이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한 1907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토착교회가 조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침례교에서는 1906년 충청도 강경교회에서 첫 번째 대화회(大和會)를 개최하고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회”라 하고 팬위크 선교사를 초대 감독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본부를 원산에 두고 남북 만주와 러시아 시베리아를 전도의 지역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감리교는 이보다 앞서서 교회 조직에 나섰다. 1901년 북감리교는 김창식과 김기범 두 사람을 집사목사로 장립하여 입교예식과 결혼식 거행권을 부여하였으며, 1904년에 연회를 조직하여 초대 감독으로 해리스가 취임하였다.

남감리교는 1897년 9월 10일에 제1회 지방회를 경성에서 개최하였고, 선교구역을 경성구역, 개성구역 및 개성 일대의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1897년 12월 8일 이덕박사의 서재에서 제1회 남감리교 선교연회가 조직되었다.
그후 1904년 조선지방회 김흥순에게 전도사 인허장을 주어서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교직을 인정하였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7년 에는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것이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시작이다.

장로교의 경우에는 1907년의 부흥운동이 교회 조직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7년 9월 17일에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회가 참여하여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 즉 서경조 한석진 양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를 목사로 장립하였다. 그리고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만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에 독로회 조직을 통보하고 그 명부에 기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로회가 창립할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가 12명, 조선인 목사와 장로가 40명, 학습교인이 21,482명, 보통교인이 69,098명, 세례교인이 17,890명이었다. 교회는 조직된 것이 38개, 미조직된 것이 984개였으며 각급학교가 402개교이며, 그 학교에 등록된 학생수가 8,611명에 이르고 있었다. 교회의 조직으로 한국교회는 새로운 성장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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