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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907년 부흥운동의 배경 |
조회수 : 2729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1905년 6월 25일에 서울에 모인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회"의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밀려 "선교사 공의회"에서도 한국에 자치적인 교회를 세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사실 한국에 교파에 구별이 없는 자립, 자치, 자주적인 민족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 획기적인 동기를 부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두 군데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시작되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감리교 선교사들의 기도회에 장로교와 침례교의 선교사들과 교인들까지 합세하여 매일 밤 집회를 하였다. 이 집회는 190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집회에 강원도 북쪽에서 일하던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 의사가 참석하였다가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하였다. 시련의 때에 선교에 임하는 자신들이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자책하면서 진행된 이 모임에 영국 웨일즈와 인도지방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부흥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받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갈망이 평양교회 전체에 짙게 깔려갔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음력 11월20일(1904.12.26)경에 평양의 야소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할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교인들이 구름처럼 모였는데, 그 시에 착한 사업이 경영이 많아 회당 교회는 익익 왕성한다 하더라”
부흥운동의 또 다른 흐름은 한국교회의 기막힌 신앙생활의 경건에서 왔다. 국가의 비운을 통회하는 마음과 사경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신앙이 자라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부흥운동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가운데 길선주목사가 한국 최초로 평양에서 시작한 새벽기도의 뜨거운 열정은 이 부흥 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용솟음치는 부흥운동운 원산의 정춘수, 전계은과 평양 의 길선주, 이 세 사람의 한국인 목사의 신앙체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따라서 부흥회 후 한국인들의 신앙의 형태는 이 들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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