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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반일 순국의 교회 |
조회수 : 2777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한국 교회의 반일 애국운동은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구체화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음모가 진행되던 1905년 6월 하와이 동포들은 윤병구목사를 대표로 선출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회하고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던 날, 전국은 비탄에 잠겼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 일로 민영환이 자결하였고, 김하원 이기범 등의 기독교인들은 종로에서 일제에 대한 경고문을 살포하면서 구국의 연설을 하다가 일경의 칼에 맞고 감금되기도 하였다.
그후 기독 청년회의 반응은 매우 험악해졌다.
이들은 자강회 동지들과 함께 친일 기관과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대한문(덕수궁)으로 나가서 통곡하며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는데, 일본경찰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애국가를 불렀는데, 너무나 애절하여 듣기에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기도를 드린 후 강연회를 시작하였다”
교회의 반응 역시 처절하였다. 기독교인 홍태순은 대한문 앞에서 약을 먹고 자결하여 구국의 의지를 보였고, 상동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는 정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이동휘나 주시경이 상동교회와 관련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였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한 것도 상동교회에서 진행되었다. 상동교회는 우리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된 것이다.
교인으로써 무력을 사용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일본인의 앞잡이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미국에서 살해한 장인환,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이재명,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우동선 외에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은 신앙과 애국을 하나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1907년부터 반일 저항운동이 거점이 교회라고 규정하고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반일운동의 불꽃은 꺼질 줄 몰랐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이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애국에 미친 광란의 무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비난하였다. 이러한 교회와 선교사의 불일치는 불행한 것이었으나, 1907년대부흥운동을 통해서 교회는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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