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조선의 다섯궁궐 그리고 수원화성답사 | 조회수 : 630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1-06 |
이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은 현대교회 박행신목사님께서 직접 찍으신 것입니다. 사진의 출처를 밝히고 현대교회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좋습니다.
서울
우리 나라 산줄기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13개의 정맥(강능 낀 산줄기)과 1개의 정간(강이 없는
산줄기)의 끝에는 마치 나뭇가지 끝에 꽃이 피듯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는 밖으로 북한산 관악산 용마사 덕양산이 있고, 안으로는 백악산(북악) 타락산(응봉) 인왕산 목멱산이 있다. 그
가운데 서울이 자라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백악과 응봉의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울의 한 복판을 흐르게 되는데, 이것이 청계천 즉 내수이고, 이것이 중량천과 합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고, 한강은 목멱산을 끼고 돌아 황해로 나가니 이것이 외수이다.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
꽃담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기와나 벽돌 등으로 집 바깥을 꾸미던 삼국시대부터 건축 도자가 발달하면서 꽃담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꽃담의 무늬는 실로 다양해서 꽃이나 나무, 새, 동물, 해와 달 등을 새겨 넣은 것이 있는가 하면 추상적인 무늬나 글자를
연속으로 배열한 것들도 있다. 이러한 무늬는 자연에 대한 경배나 기원, 상징 등을 담고 있다. 보기에만 아름다운 무늬가 아니라 질병이나
귀신으로부터 집안을 지키려는 뜻이나 만수무강, 수복강녕 등의 기원을 꽃담에 담은 것이다.
궁궐의 담장 가운데서도 아름다운의 극치를 자랑하는 것은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이다. 대왕대비의 거처였던 이곳은 아래쪽 3단은 화강석으로 쌓고
그 위에는 붉은 벽돌로 길상문자와 고라무늬 등 갖가지 문양을 짜 맞추어 장식을 했고, 중간 중간에 액자처럼 꽃이 그려진 그림판을 배치하였다.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 2천
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 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창덕궁은 사적 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진은 새로 복원된 건춘문의 모습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인정문과 정전인 인정전으로 이어진다.
낙선재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한다. 도심 한복판에 숨어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궁궐의
영역이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인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와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 했던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 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그러므로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들 가운데 가장 최근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
후원은 조선시대의 창덕궁 뒤쪽에 자리잡은 정원으로 왕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그동안 이곳은 비원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후원을 격하시켜 비원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된다. 본래는 비원이라 하지 않고 처음 만들어진 조선시대 초기부터 고종 때까지 후원, 북원 그리고
금원으로 불려졌다.
후원에는 수 많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잔에서 보이는 주합루일대는 창덕궁 후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뒤에 큰 건물이 주합루이고, 그 앞에 작은 정문이 어수문이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의 후원에 규장각을 짓도록 명했다. 규장각은
개혁정치의 상징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이나 서얼출신학자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였다. 주합루의 1층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다.
창경궁 선정전의
일월오악도
우주의 중심인 해와 달
오악사상 반영인 다섯개의 봉오리
그리고 소나무와 폭포를 그렸다.
병풍에 그려
정전의 임금의 의자 뒤에 놓았으며
주로 왕과 관계되는 곳의
장식 그림으로 그렸다.
임금이 우주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덕수궁의 석어당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들이
화재로 소실되어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되면서
궁의 모습을 갖추어 나아갔다.
사진은 석어당인데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현재의 덕수궁 일대에
시어소를 마련하고
거처할 당시에 임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선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공간이다.
태조의 한양 천도(1394) 후 이듬해 종묘를 지었으며, 세종 3년(1421) 모실 신위가 늘어나자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고, 1836년까지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종묘의 정전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고, 종묘제례악(제사드릴 때의 음악)도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종묘 정전의 회랑
이곳에는 서측을 상(上)으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런 다음 서쪽부터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5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익종, 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수원 화성
화성은 사적 제3호로서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 재위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축성시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 전란 등으로 인하여 일부 소멸되고 41개 시설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화성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되어 1997년
12월 유네스코 총회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진은 화서문 동북쪽 약 10m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서북공심돈이다. 공심돈은 위 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 동정을 살피며 불랑기백자총 등을 발사하는 시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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