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길따라 물따라 남해안 역사기행 | 조회수 : 619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7-21 |
이번 여름 역사기행은아름다운 남해안으로 다녀왔습니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문화 그리고 진한 역사의 향기를 담고 있는 땅입니다.
지금도 여행지의 한 곳 한 곳에서 느꼈던 역사의 교훈과 우리 산하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숨이 가쁘고,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번 여행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니다
역사기행은 단순히 관광지를 돌아보는 여행이 아닙니다. 반도의 반 토막을 구석구석 밟으며 문화를 경험하고, 역사와 만나며 미래를 바라보는 여행입니다.
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삶에 대한 벅찬 감동과 기대가 생겨나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여행을 마칩니다.
승보사찰로서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송광사
3보사찰
불보사찰 - 통도사(석가모니사리)
법보사찰 - 해인사(팔만대장경)
승보사찰 - 송광사(16명의 국사)
송광사의 사세에 비해서
다소 규모가 작은 일주문에
걸린 현판에는
승보사찰 송광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림임을 알리는
글씨가 세겨져 있다.
대웅보전
1988년에 세워진
송광사의 중심전각으로
넓은 크기와 아(亞)자형의
이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웅보전
1988년에 세워진
송광사의 중심전각으로
넓은 크기와 아(亞)자형의
이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약사전(국보302호)과
영산전(국보303호)
대웅보전 구역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건물들이지만
지붕만큼은
화려한 다포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음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된
황실 기도처인데,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왕과 비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다.
우화각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가는
연못 위의 홍교가 삼청교이며
그 위의 건물이 우화각이다.
‘우화’라는 말은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나라로 떠올라 신선이 된다는
의미이다.
고인돌공원
주암댐 수몰지역서 발굴한
수백기의 고인돌을 모아 놓은
전국 최초의 고인돌 공원이다.
남방식과 개석식고인돌
남방식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고,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의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중국에 약 340기,
일본에는 600여기가 분포되어 있고,
한반도에는
무려 3만여 기가 분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분포된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낙안읍성 마을
순천시 낙안면에 자리잡은
옛읍성인 낙안읍성은
살아있는 민속마을이다.
사진은 큼직한 자연석으로
성벽 아래를 쌓고,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쌓은
낙안읍성의 동문이다.
낙안읍성에는
우리나라의 성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해자를 파서
성읍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다.
해자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성밖 주변에 못을 파서 만든
방어 시설물이다.
낙안읍성의 성벽은
성위에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다.
높이 4m에 직경이 1m 남짓한
돌들로 둘레 1천3백84m에 이르는
성이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낙안읍성 마을에는
지금도 1백8세대가 생활하고 있다.
돌담길
마을의 구석구석에는
모나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돌담들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여름이면
그위로 덩굴식물들이 자란다.
돌샘
남문 뒤에 자리한 돌샘은
금전산을 비롯한
주위의 높은 산에서 스며 내려온
맑은 물이 나는 샘인데,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즐겨 마시고 있다.
전통체험장
마을에서 사용하던
전통의 농기구와 가정용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전통체험장이다.
낙안읍성의 동헌
읍성은
주로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기 마련이므로
성안에 민가와 관아가 공존한다.
순천 신성리 왜성
이 왜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이 쌓은 것이다.
왜군들이 이순신의 수군에게
연전연패하자
바다 가까운 육지에 성을 쌓아
조선의 수군은 공격할 뿐 아니라
조선굥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사진은 신성리 왜성의 본진에서
장수가 지휘하던 사령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광양만 앞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고니시(소서행장)의 부대가
철수함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게 된다.
이순신의 수군은
이곳에서 철수하던 왜군과
노량바다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충무공 유허지
"지금은 전투가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한 놈의 왜적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선조 31년(1598) 11월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여
도망치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던
왜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눈앞에 둔 이순신 장군은
54세를 일기로 이곳 관음포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이락사는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먼저 육지에 안치된 곳이다.
노량바다
퇴각하던 왜군과 싸움을 벌이던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목숨을 잃은 노량 앞바다.
이 해전이 있게 전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죽음이 기다린다고 하여도
나는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거북선 모형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노량 앞바다에 재현한 거북선 모형
거북선 모형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노량 앞바다에 재현한 거북선 모형
2차 진주성싸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였다.
이때 관기였던 논개가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나와서
(깍지 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왜군에게 조선 여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진은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했던 의암이다.
1차 기행팀
김시민장군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3만 여명의 정예 왜군을 패퇴시켰던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1차 진주성 싸움의 명장이다.
임진왜란 3대첩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
김시민장군의 진주성대첩
진주성
사적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촉석성이라고도 하며,
본래는 백제 때의 거열성터였다.
2차 기행팀
상족암
이곳은 켜켜로 쌓아 놓은 시루떡을
연상시키는 퇴적암의 덩어리로
그 샘김새가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하며 ‘상족’,
또는 ‘쌍족’이라고 불린다.
바위 곳곳에는 파도에 침식되어
생겨난 깊숙한 해식동굴이
이리저리 미로를 만들고 있어서
신비감을 더한다.
켜켜이 쌓아 놓은
시루떡을 연상시키는
상족암의 퇴적암덩어리에서 찰칵
상족암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룡이 집단 서식했음을
증명해주는 발자국 화석지이다.
이곳 해변 갯바위에는
수많은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밀집해 있는데, 갯바위 여기저기에
마치 커다란 전복 껍질로
눌러놓은 듯한 길이 30cm쯤 되는
둥글고 길며 주변보다 조금 밝은 색
무늬들이 보인다.
깊이는 대개 3∼5cm.
이런 자국들이 10여 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직선상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공룡의 발자국이다.
공룡발자국 탐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2차 역사기행팀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최초로 자리잡은 곳이고
앞바다 한산해역은 세계 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대첩 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한산도의 지명치고
충무공과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충무공의 호국혼이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섬이다.
바닷길을 따라
제승당으로 올라가고 있는
제1차 남해안 역사기행팀
충무사
한산섬의 제승당은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세운 것으로
삼도 수군통제영이 통영 으로
옮겨질 때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다.
이 일대에는 중심건물인 제승당과
충무공의 사당인 충무사,
그리고 수루가 복원되어 있다.
한산도의 수루에서 내려다 본
한산 앞바다의 전경이다.
이 바다에서
충무공은 학익진의 대형으로
왜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했다. 이 바다에는 그 때의 감동을 되새기는 거북등대가 자리 잡고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수루에서 읊은 이 시조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충무공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벅수
마을에 재앙이 생기는 것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돌장승
할아버지, 할머니를 닮은
전통적인 장승과는 달리
위압적이고
괴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병관
1603년(선조36년)에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세운
세병관은 여수의 진남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웅장한 풍채만은
크게 뒤질 것이 없는 객사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
오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관아를 지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세병관만이 남아 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은
당나라의 시인 두보의 “세병마”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安得壯士挽天河하여
淨洗兵甲長不用이리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 물을
끌어들일 장사를 얻어
무기들을 깨끗이 씻어 두어
영원히 사용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충렬사
1606년(선조39년)에
충무공의 부하였던 이윤룡이
통제사로 부인해왔을 때
왕명에 따라 지은 사당이다.
충렬사는 헌종4년에 사액을 받았고
같은 해,
강당과 동 서재를 갖추었는데
통제영이 해체될 때까지 291년 동안
삼도수군통제사가 이곳에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신방석
충렬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고
잡귀를 물리치도록
신방석에 새긴 해태상이다.
충렬사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자그마한 건물로
선조39년에 왕명으로 지은
충무공의 사당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6.25전쟁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파병된
21개국의 국기가 게양된 상징물
포로수용소의 전경
신현읍 독봉산 아래 자리 잡은
포로수용소의 전경이다.
주민들이 살던 집과 논을 징발하여
천막을 세우고,
17만 명에 달하는
전쟁포로를 수용하였다.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디오라마관을
관람하고 있는 1차역사기행팀
탱크 전시관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유적관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포로수용소 유적지
한 때는 이 일대가
모두 포로수용소였으나
지금을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그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사진은
고현중학교 근처에 일부 남아있는
포로수용소의 흔적 가운데
경비대장의 집무실이다.
옛 포로수용소 일대에 재현한
수용소의 건물의 모습이다.
포로수용소 전시관의
대형사진 앞에서 1차기행팀 일동
안타깝게도 2차 기행팀은
포로수용소를 견학하지 못했다.
외도
아름다운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의
외도 해상농원은
척박한 바위투성이의 버려진 섬을
한 부부가 30년간
자연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섬 전체를 정원처럼 꾸민
해상 식물공원이다.
1차기행팀은
바다의 안개 때문에 가지 못했다.
비너스 가든
베르사이유를 축소 해 놓은 듯한
서구식 정원에
12개의 비너스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국의 계단
편백방풍림 사이에
테피스트리로 잘 짜놓은 계단과
여러 가지 꽃들과 나무들을
주제별로 심어서
마치 천국에 온 느낌을 준다.
외도에는 제기차기 ,기마전 등의
민속놀이를 표현한
한국전통놀이 조각이나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등
수많은 조각 작품이나 상징물들이
자연과 어울려
그 예술적 가치를 더욱 발하고 있다.
한 바탕 쏟아질 것 같은
시커먼 먹구름 때문에
어둑컴컴한 중에
플레시도 없이 찍었는데
그런데로 잘 나왔네 ^^;
선착장으로 가는 길
외도 관광을 마친 역사기행팀이
수 많은 관광객들과 어울려
빨간 기와가 이어진
예쁜 정문 안내소를 거쳐
선착장으로 내려가고 있다.
해금강
칡뿌리가 뻗어 내린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갈도라고 하는 이 섬의 본 이름보다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해금강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는 이 섬은
최고의 비경인 십자동굴과
사자바위, 부처바위, 촛대바위 등
기이한 암석이 많다.
그밖에 환상적인 일출과
월출로 유명한 일월봉도 있다.
낙동강 하구언
하천의 정상적인 기능유지와
물자원의 효율적안 이용 등의
기능을 가지는 시설이다.
특히 하천의 하류부근에서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막아 염해를 방지함과 동시에,
헛되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던 물을
하류에서 막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또 하구언은 홍수 때의 물 관리,
평상시 염해방지,
농업용수와 공업용수의 공급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하구언은 물 관리에 대한
복잡한 기능을 수행함하는
중요한 하천 관리시설이다.
1987년 11월 준공한
낙동강 하구둑 준공기념비
엄청난 빗줄기 속에서
낙동강 하구둑을 답사한
1차 역사기행 팀
화창한 날씨속에서
하구둑을 답사한 2차 기행팀
을숙도 철새 도래지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는
50여 종, 10만여 마리의 철새들이
쉬어 가는 철새들의 낙원으로
세계 적인 관광명소이다.
붉게 타 들어가는 늦가을 석양 무렵
바람결에 쓰러지는 하얀 갈꽃위를
무리지어 날개짓 하는
철새들의 군무는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조류는
총 394종인데,
조류를 전공하는 사람이
1년 동안 볼 수 있는 조류는
220여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조사에의하면 개체수도
80%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예상되며,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서
매년 10% 이상이
공해와 물의 오염, 개발, 인구 팽창
등으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갈치 시장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자갈치란 이름은
지금의 충무동 로터리까지
뻗어 있던 자갈밭을
자갈처라 불렀던 데서 유래하였다.
원양 및 연근해어선 부두
자갈치시장에는 우리나라의
가까운 바다(연근해어업)와
먼 바다(원양어업)에서 잡아오는
생선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곳이다.
수산물 경매시장
매일 새벽 3시~4시 경에 열리는
경매시장을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싱싱한 생선들이
전국각지로 팔려나간다.
태종대 모자상
삶에 낙심하여 자살하려고 올라온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서
자살바위에 세운 모자상.
태종대
부산시 동삼동 해안에 위치한
기암절벽인 태종대는
해발 250m의 최고봉을 비롯하여
542,390평의 면적에 이르는
명승지로, 울창하게 우거진 수목과
파도가 부딪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몽돌해수욕장
태종대에서 등대쪽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둥근 자갈돌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자리잡고 있다.
태종대의 융기 파식대지
등대 아래쪽에
발달한 융기 파식대지는
태종대를 대표하는 명소로
그 형성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2만 년 전인
제4기의 최종 간빙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삼동 패총
선사시대의 인류가
조개를 잡아먹은 뒤
버린 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인 패총이 발견된 장소
패총
조개더미 주변은
조개더미를 만든 사람들의
집 자리와 무덤자리가
대규모로 발견되기도 하고,
조개더미 안에서 내용물이
함께 나와 선사시대의 생활 모습과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 된다.
여행도 막바지에
동삼동 패총전시관을 견학한 후
함께 사진을 찍은 1차기행팀
부산항
부산항은 1876년(고종 13) 2월27일 근대항으로서는 제일 먼저 개항한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이자
내·외무역의 관문이다
부산항 컨테이너 전용부두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은
1906년 부두축조공사를 시작하여
1945년까지 1,2,3,4, 부두와
중앙부두를 축조하여
근대항만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고,
그후 1,2단계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자성대 컨테이너부두를 비롯한
4개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국제여객부두 등을 축조하였다.
1985년이후 3단계,
4단계 개발사업으로
컨테이너 터미널을 축조하여
늘어나는 컨테이너화물 수요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부산항 여객선터미널
국내 유일의 국제여객 항로로서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간을
운항하는 국제여객과
연안항로인 부산과 제주 그리고
거제도와 한려수도를 연결하는
쾌속선 등 13개 항로에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UN기념공원
1950-1953년의 한국전쟁 중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유엔기 아래서 싸우다가 전몰한
장병들의 영령을 위하여
1951년 유엔군 사령부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며,
1959년에 대한민국과 유엔간에
체결된 "재 한국 국제연합 기념공원의 설치 및 유지를 위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간의 협정"에 의하여
설치된 세계 최초의 기념공원이다.
UN 기념공원의 상징구역
UN 기념공원의 상징구역에는
한국전쟁 중에 참전한 21개국의
국기와 UN기가 계양되어 있다.
한국전쟁 중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지원한 나라는
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으로
모두 21개국이다.
한국전쟁 중에 희생된
유엔군 전사자는 37,897명 에
이른다. (한국군 237,686명 제외)
그 중 11,000명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은 본국으로 이장되고
현재는 2,300기가 안장되어 있다.
각 나라별 유해 안장현황
호주/281
캐나다/378
프랑스/44
네덜란드/117
뉴질랜드/34
노르웨이/1
한국/36
남아프리카공화국/11
터키/462
영국/885
미국/36
기타/15
총11개국/2,300
피자~헛에서의 저녁식사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역시기행팀
새벽 2시에 떠나서 7시에 송광사에 도착한 2차기행팀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송광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다.
순천의 신성리 왜성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비겁한 삶을 살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기행팀
아이들과 함께
우리 땅을 돌아들며
그 아름다운 풍경과 그윽한 정취,
오천년의 역사를 만나며 다닌지가
벌써 7년입니다.
새벽닭도 울기 전에 일어나
종일 유적지들을 더듬어 다니다가
이미 해가진 도로를 달리며
숙소를 찾아 헤매는
어려운 여행이지만
힘든 만큼 큰 보람을 느끼는
그런 여행입니다.
이번 여행에도 함께한 어린이들과
여행기간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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