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경주 역사기행 | 조회수 : 41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2-01-07 |
불국사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권5 <대성효2세부모>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불국사에는 다보탑, 석가탑을 비롯한 수 많은 국보와 보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분황사 탑
이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 올린 '모전 석탑‘이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완성된 분황사 창건 당시의 유물로 추정되며,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의 가장 오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탑은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세에 무너져서 현재 3층만 남아 있다. 사각형의 기단 위에 세워진 1층 탑신의 4면에 화강암으로 만든두 짝의 문이 달린 방이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의 수호를 위해 금강역사라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감은사 탑
감은사지 금당 앞에 동, 서로 서 있는 2개의 석탑을 가리켜 감은사지 3층 석탑이라 한다. 이 탑은 높이 13.4m 이며 이중의 기초석 위에 장식 없는 몸체와 옥개 받침을 5단으로 둔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 탑은 경주에 있는 3층 석탑으로서는 분황사 탑을 제외하고 가장 크며 전체적인 비례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매우 안정감을 주는 뛰어난 건축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탑은 우리 나라의 탑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탑이기도 하다.
신문왕능
형식이 무열왕릉보다 한층 발달한 이 능은 문무왕의 맏아들인 신문왕(681~692)의 능이다.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의 맏아들로 재위 12년 동안 벼슬제도 정비, 왕권 확립, 학문장려로 국학을 설치하여 신라전성시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능의 구조는 원형토분으로 봉토의 둘레 돌이 5단으로 되어 있으며 삼각형의 지탱석을 세워 튼튼히 하였다.
삼릉
삼릉이 자리잡은 삼릉 계곡은 남산에서 가장 길고 가장 많은 불상이 있는 계곡이다. 이 계곡의 초입에 아달라왕과 신덕왕, 그리고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세 왕릉이 있어서 이 계곡을 삼릉계곡이라고 부른다.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대앙암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큰돌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체 관측대이다. 높이 9.18m의 원통모양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석정
포석정은 신라 임금의 놀이터로 만들어진 별궁으로서, 건물은 없어졌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시회/詩會)를 한 것으로 생각되는 전복 모양의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다.
원래는 물이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를 알 수가 없고,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룬 이 석조물에서 우리는 신라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황룡사출토 치미(망새)
황룡사지는 늪지 25,000여평을 메워 553년에 시작하여 선덕여왕 15년(626) 완성하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 지은 절이다.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었고, 중금당 좌우에 회랑을 갖춘 서금당이 있었으나 병자호란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3만 여점의 유물과 중국계 '청자'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치미인데, 그 크기로 보아서 황룔사가 얼마나 큰 규모의 절이었는지즐 짐작할 수 있다.
남간사터 당간지주
남간사는 남산에 있었던 절 가운데서도 가장 이름이 높은 절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살던 일넘이라는 스님이 글을 써서 신라에 불교를 승인시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알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이 절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이 남간사터 당간지주로서 남산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이 당간지주는 꼭대기에 십자형의 간구가 있고, 기둥에는 두 대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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