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제주도 역사기행 | 조회수 : 452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1-07-31 |
혼인지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169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혼인지는 삼성혈에서 솟아난 고, 양, 부 3신인이 벽랑국의 3공주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목욕을 재계했다는 연못이다.
중심 너비 50m, 면적이 500여평이 되는 혼인지는 그 남쪽에 '婚姻池'라 음각되어 있는 자연석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세공주가 나무 상자에 모셔진 채 발견된 곳이 속칭 '괘성개'이며, 도착한 해안을 '황루알(황노알)'이라 한다.
돌하르방
제주도말로 「돌할아버지」라는 뜻이다. 돌하르방은 성문의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벅수, 장승과 같이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주술적인 믿음이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서 마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 제주도에는 47기가 남아 있다.
사진은 대정읍성의 돌하르방이다.
환해장성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 삼별초는 반몽고, 반개경정부의 세력을 결집하여 봉기하게 된다. 봉기직후 이들은 진도로 그 거점으로 옮겨서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여몽군을 압도하였지만 1년여만에 진도 정부가 무너지자 최후의 거점을 제주로 옮기고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항쟁의 거점을 마련한 후 여몽군의 제주도 상륙을 차단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환해장성을 쌓고. 내륙에는 항파두성을 쌓았다.
추사적거지
제주도는 조선조 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와서 살던 곳이다. 이건이 '제주풍토기'에서 “탐라는 온 나라 죄인의 유형지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제주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하여 제주에 유배된 사람의 수는 무려 200여명이나 되는데 가장 고령자는 신임으로 84세였고, 최연소자는 소현세자의 3남인 석견으로 4세였다. 광해군도 이곳에 유배되었고,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유배의 형벌을 이곳에서 감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정, 정온, 신명규, 김진구, 김춘택, 김정희, 최익현 등이 있다.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의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며 서기 1448년 세종 30년 제주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상무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정자 정면의 제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이며, 정내의 탐라형승이라는 대자액은 선조 임금 때 영의 정 이산해의 글씨라 한다. 또한 대들보의 벽화가 유명한데 작자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 초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읍민속마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는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3현으로 나뉘어졌을 때 정의현 현청이 있던 마을로 제주도 동부 산간지대 마을의 특성이 잘 남아 있다.
유형, 무형의 많은 문화유산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마을 형태의 민속 경관이 잘 유지되어 있어 중요민속자료 제 188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사진은 성읍민속마을의 똥돼지이고, 돌로 쌓은 것이 화장실이다.
서빈백사
우도의 서쪽 끝 해안에 형성된 산호 모래사장으로 제주도의 3대 보존자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호는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란다고 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희고 깨끗하다.
서빈백사와 연해있는 바다는 넓미역이 잘 자라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은 화산의 분출에 의해 형성된 분화구로 높이 182m에 정상은 3만여평의 초지와 왕관같은 99개의 작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남쪽과 북쪽의 외벽은 바닷물에 의해 빙벽(氷壁)같이 날카롭게 깍아내린 절벽이고, 서북면 만이 유연한 잔디 능선으로 성산 마을과 이어져 있다.
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돋이 광경은 참으로 장엄하다. 이 지역은 천연 보호구역으로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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