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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 사람, 존 낙스 |
조회수 : 3090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4-11-25 |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 사람, 존 낙스 John Knox
1514년경 하딩턴 인근에서 태어난 존 낙스는 1540년쯤 회심했으며, 그의 신앙은 다분히 루터적이고, 반교황적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낙스가 세인트앤드루스의 수비대에서 설교할 때 그의 나이는 30세 정도였다는데, 이때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적그리스도라 규정하였고,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예배의 근간은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훈련되지 않은 스코틀랜드 시민들과 수비대는 프랑스를 등에 업은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 내지 못하였고, 낙스를 포함한 전 수비 대원들이 포로가 되어 프랑스 갤리선에서 노 젓는 노예가 되었다.
낙스는 가혹한 노예생활의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낙스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국 정부는 포로교환의 방법으로 그는 구출하였고, 그의 탁월함을 인정한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배려로 궁정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었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낙스를 <청교도의 창시자>로 평한다. 물론 청교도주의의 기원은 정신과 원리 면에서는 윌리엄 틴데일이지만, 그 원리를 보다 분명히 한 사람은 낙스라는 것이다.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메리 튜더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때 300여 명의 개신교 신자가 순교하였고, 800여 명이 유럽대륙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낙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요한 칼빈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나팔수라고 불렸던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목숨을 걸다시피 하였는데, 그는 기도할 때마다 “주여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종이 죽겠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그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어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낙스와 격렬한 신앙적 논쟁을 벌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름난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수 만 명의 군대가 아니라 존 낙스의 기도이다.”
1572년 11월 24일 사망한 후 그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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