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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만을 위해 산 종교개혁자 칼빈 |
조회수 : 2587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4-11-14 |
하나님만을 위해 산 종교개혁자 칼빈 John Calvin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에서 출생한 칼빈은 지방 귀족의 비서이며 경리인 아버지의 보호아래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1523년부터 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에 의해 복음주의적,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과격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 것을 배척하고 루터와 쯔빙글리를 따라 설교만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에 부딪쳐서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는데, 그곳에서 설교자·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하였다. 3년 후,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교회제도를 정비하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그 후 제네바는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루터가 중세의 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종교개혁이 완성된 것은 칼빈에 의해서이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을 체계화하여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칼빈은 주님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다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가가 남긴 기독교적 업적은 매우 컸다. 존낙스는 칼빈의 제네바 개혁을 가리켜 “사도 시대 이래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이다”라고 했다.
그는 하트표시의 불타는 가슴을 손에 잡은 그림과 함께 새겨진 다음과 같은 말을 담은 표식을 자신의 코트에 매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당신의 뜻을 위해 기쁘고도 신실하게 드리나이다.” 그는 이를 자신의 필생의 모토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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