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사람들
•홈  >  쉴만한물가  >  믿음의사람들

목록보기

  제  목 :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찌 J. H. Pestalozzi 조회수 : 2987
  작성자 : 현대교회 작성일 : 2004-04-27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찌는 스위스 쮜리히에서 1745년에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세 때 그의 부친이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페스탈로찌는 종교적 감성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 어머니 수잔나로부터 인생과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항상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삶을 살았기에 훗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도 언제나 그의 마음에 가정의 의미가 맑고 따뜻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1769년 안나와 결혼한 그는 첫아들 야곱의 탄생과 더불어 빈촌인 빌의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고, 첫 번째 교육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게 된다. 처음에는 20명 남짓한 아이들을 모아 시작한 사업은 나중에는 80명이 넘어섰고, 이 때 그는 각 어린이들의 개성을 관찰하였으며, 이러한 관찰기록은 그가 교육사상을 확립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1780년에 이르러 그는 무일푼으로 교육의 사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러한 실패로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에 되었고, 또한 사랑하는 아내 안나의 건강도 나빠지게 되었다. 주변에서 호의를 가졌던 사람들은 이제 그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스탈로찌는 깊이 거듭나게 되었고,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생활환경과 어려움에 의해 교육자로서의 자각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자 거기에서 종교적인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교육사업의 실패한 후 쓰여진 ‘은좌의 황혼’은 종교적인 글로서 비록 세간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저술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1798년에 정부는 집이 없거나, 가난으로 집이 없는 것과 거의 같은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슈탄쓰에 고아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페스탈로찌를 그 고아원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환경은 열악하였으며 그를 도와줄 사람은 오직 식모 한 사람뿐이었다.

이 고아원의 외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건강상태, 심적인 불안상태는 페스탈로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그의 교육에 의해서 어린이들은 점차 안정과 정상을 되찾아 갔지만, 179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슈타스 고아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며, 병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교육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27년 2월17일 81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

페스탈로치의 비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태어나 1827년 2월17일 부르그에서 서거하다. 노히호프에서의 빈민 구제자. 린하르트와 게르트루드에서의 국민 선교자, 슈탄트에서의 고아의 아버지, 부르그도르트와 뮌헨북세에서의 국민학교 창설자, 이펜르텐에서의 위대한 교육자, 참된 인간, 참된 기독교인, 참된 시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버렸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그는 철저히 신앙에 근거하여 이상적인 교육을 펼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 동상은 페스탈로치가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인자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어린이들은 위대한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는 모습으로 만들어 졌다. 이 동상은 미우 훌륭해 보였으나, 생전에 페스탈로치와 절친했던 친구들은 이 동상이 그의 생애를 잘 표현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동상을 제작하였다.

새로운 동상은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이가 스승인 페스탈로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스승의 어깨 넘어 먼 곳을 바라보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것은 페스탈로치가 아직 달성하지 못한 목표인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정교육을 중시 여겼건 그는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부는 성경의 힘으로 깨끗한 사랑을 나누었고, 오랜 세월동안 갖가지 고난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빈곤으로 인해 마른 빵을 먹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힘썼습니다. 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우리 두 부부가 비록 육신적으로는 떨어지게 될 지라도 영적으로는 함께 있습니다.”

그의 생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길을 가다가 나이어린 거지를 만났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한 푼의 돈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구두에 있는 은장식을 떼어 성경책과 함께 주면서 전도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그 젊은이는 페스탈로치가 주었던 은장식과 성경책 때문에 소망을 갖게 되었고, 새사람이 되어 사업가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전도와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라며 거액의 돈을 기부하였다.

페스탈로치는 늘 이렇게 말하며 살았다. “가정은 가장 위대한 학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가정의 붕괴에 있다. 오늘날 교회는 참된 믿음으로 세워지는 가정들을 만들어 내는데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또 다른 페스탈로치를 이 땅에 남기는 지름길일 것이다.

 "

  이전글 : 톨스토이 Nev Nikolaevich Tolstoy ②
  다음글 : 화니 제인 크로스비 F J Crosby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