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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 ③ |
조회수 : 3029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5-04-23 |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 ③ William Carey
캐리의 인도 행을 막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내 뿐 아니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캐리의 인도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은 후에는 간절히 기도를 지원하게 되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힌두교의 과부들은 ‘사티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에 태워 죽어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갠지스 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던 인도에서는 선교가 절대 금지되고 있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다. 아내 도로시와 두 아이가 이질에 걸렸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 수 있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겠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 말을 습득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다. 이처럼 벵갈에서 7년간 땀 흘려 선교하며 노력하였지만,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다.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이나 되는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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