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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역사를 바꾼 천문학자 케풀러 Johann ① |
조회수 : 2591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4-08-29 |
독일의 과학자요 천문학자였던 케플러는 조산아로 태어나 허약한데다가 4살 때는 천연두로 한 쪽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시력까지 극도로 나빴다. 이처럼 그는 육체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17세에 전상으로 죽자,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의 편수를 위촉받아 일하면서, 그 해 겨울의 강추위와 전쟁을 예고한 것이 적중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또한 1595년 천체력을 발간하고, 이듬해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브라헤와 갈릴레이를 알게 되었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신교신자인 케플러는 구교파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으며, 그 후 1600년 그라츠대학을 떠나 프라하로 옮겨 브라헤의 제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화성의 운행을 관측하였고, 브라헤가 16년간에 걸쳐 연구한 화성 자료를 브라헤의 임종시 인계받았다. 1601년 브라헤의 후임으로 궁정 수학자가 되었다.
그 후 행성들을 연구하던 중에 뱀주인자리에 있는 초신성, 즉 케플러신성을 발견하였으며, 1609년에는 화성관측 결과를 《신 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전시켰다.
1611년에는 천연두로 아내와 한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절광학 Dioptrice》을 저술하여 케플러식 망원경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1612년 루돌프 2세가 죽어 더 이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린츠대학의 수학교수 겸 측량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후 <우주의 조화>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였다.
1626년 종교전쟁을 피하여 울름으로 이전하였고, 로그를 사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지구가 타원으로 도는가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제시하지 못했는데 그 문제의 해결은 인류 최대의 과학자 뉴턴의 몫이었다.
1628년 발렌슈타인 후작의 전속 점성술사가 되어 슐레지엔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630년 11월 15일 길에서 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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