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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복음전파를 가장 큰 기!쁨로 여긴 선교사, 윌리엄 리처 |
조회수 : 3066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7-02-15 |
조선 땅에 뼈를 묻은 사람들
복음전파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 선교사, 윌리엄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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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영국 런던에서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윌리엄 리처드는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사관으로 봉직하던 중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내한하였다. 이 무렵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의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구세군사관학교(신학교)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아이가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고아원 운영과정에서 퍼진 천연두 때문에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하고 리처드 자신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실베스터 선교사의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되어 실베스터 선교사의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는데, 셋째 아들 더글러스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고, 곧바로 큰 아들 고던도 사망하였다.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 땅을 밟은 지 2년만이었다. 그 후 그의 부인과 4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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