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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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이 산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리스인들처럼 우리 자녀들에게도 본다는 것은 숨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일회용 이미지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수 십 년, 수 백 년, 또는 수 천 년 동안 살아남아 우리에게 생기를 주고, 새로운 경험을 선물하는 고품격의 이미지를 만나도록 주선하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간절함을 채워줄 공간이 박물관(시간창고)입니다.
박물관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역사는 무엇인가"를 배우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천년 역사와 존재를 뛰어 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진기하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역사적인 공간 박물관, 지나간 시간들이 겹겹이 쌓인 시간창고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기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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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국립박물관 고고학관의 각 시대별 설명 조회수 : 1920
  작성자 : 박행신 작성일 : 2006-04-24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 낸 최초의 문화단계이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이다. 그들은 사영과 채집 생활을 하q였으며,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다. 구석기시대는 도구의 발달과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호모 에렉투스의 시대로 여러 기능을 가진 찍개류, 주먹도끼 등의 큰 석기를 사용한 시기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던 중기는 석기가 점점 작아지고 기능도 분화되어 여러 종류의 석기들이 만들어 졌다. 후기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시대로 돌날 기법이 등장하여 석기제작 능력이 향상되었다. 이어 작은 돌날을 나무나 뿔에 결합하여 사용하는 등 정교하고 전문적인 기능을 가진 도구가 만들어 졌다. 구석기 시대 후기 한반도에는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슴베찌르개와 작은돌날석기가 출토되고 있어 주변의 지역과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기원전 8.000~기원전1,000년 무렵)는 빙하기 이후 달라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집터와 무덤, 조개더미 등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400여곳에 이른다. 서울 암사동과 강원 양양의 오산리, 그리고 부산 동삼동 등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신석기인들은 물과 식량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식물을 채집하면서 살았다. 이 시기에 조, 기장 등을 재배하는 농사도 부분적으로 이루어 졌다. 간석기와 뼈 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수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은 실로 짠 옷감이나 동물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옥, 동물의 뼈, 뿔, 조가비 등으로 몸을 꾸몄다. 또한 이들은 일본열도, 중국의 동북지역, 러시아의 연해주 등 주변 여러 집단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기원전 10~4세기)는 우리나라에서 금속기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대로서 중국의 동북지방을 비롯한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당시 청동기는 권의의 상징물이나 의식용기구로 사용되었고, 일상에서는 주로 간석기나 목기,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은 벼농사 등의 농사를 지으면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규모가 확대되어 오늘날 농촌과 비슷한 대규모 마을이 생겨났다. 집답 내에서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도 생겼다. 무덤으로는 고인돌, 돌널무덤, 독널무덤 등이 있다.
한편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중국엣 철기가 도입되면서 초기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 철기는 북부지역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한반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단단하고 예리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발달은 사회 문화의 발달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 각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집단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는 삼국시대의 원초적 단계로 고구려가 국가 단계로 성장하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의 모태인 삼한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대에는 철기생산이 더욱 본격화되어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철기의 사용으로 농사의 효율이 높아져 생산력이 향상되고, 사회의 계층분화가 빨라져서 질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낙동강 하류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倭)에도 수출하였으며, 중국, 왜, 북방의 문물이 들어오는 등 대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 졌다. 특히 한사군의 하나로 평양 일대에 설치된 낙랑군은 중국의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토기의 제작기술이 도입되어 회색토기가 만들어 졌고, 목기, 칠기를 비롯한 다양한 생활용품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독널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등이있다.


철기문화의 발전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기원전 3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의 사용으로 향상된 생산력을 청지 경제 사회 문화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로 만든 호미와 괭이 낫 반달칼 등의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점 중국 한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칼 투검창 꺾창 등의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게도 하였다. 이 시기의 철기는 종류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 등의 주변지역에 수출하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가야를 아우른 신라가 발달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주변의 지역을 통합하면서 왕권국가로 성장, 발전한 시기이다. 한반도의 북쪽과 만주 일대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정치 사회적인 통합을 이루었고, 남쪽의 마한과 진한 변한 소국들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 성장하였다. 나라마다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체계를 정비하고, 지방 세력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삼국은 상호협력과 견제 속에서 국가 발전을 지속하였고, 고유의 문화를 기반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고대문화의 수준을 높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과 왕권 강화의 이념적 배경이 되었으며, 불교문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꽃피게 되었다.
한편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고대국가의 성립과 문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문화적 통합의 길을 열었고, 만주지역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등장하면서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대인과 새

구대 사람들은 새가 봄철에 곡식과 씨앗을 가져다주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이른 바 조령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로부터 새를 형상화 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적에는 오리모양 토기와 새모양 목기, 새무늬 청동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어 새와 관련된 의례나 제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 그뒤 313년 평양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의 랴오허에서 지린성 쑹화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의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질서를 좌우하는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그리고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학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고구려의 벽화무덤은 고구려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고구려 분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런, 지안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의 옛 수도를 중심으로 발견된 성,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의 왜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백제

백제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에 세운 백제국이 점차 마한 지역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나라이다. 그후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 사비(지금의부여)로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유역에 도읍한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백제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을 석촌동 무덤과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의 생활유적에서 확인된다. 웅진기(475~538)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문화 강국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는 중국의 남조와 관련성이 엿보이는 무령왕릉과 그 출토유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비기(538~660)는 참신한 조형감각과 세련된 공예기술이 발달한 백제 as화의 절정기이다. 이 시기에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백제 금동대향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백제 문화는 일찍부터 왜에 전해져 일본의 아스카 문화가 형성되는 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야

가야는 변한의 옛 당이 낙동강 중하류에서 풍부한 철 자원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전기의 가야는 경남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바닷길로 낙랑과 왜에 철을 공급하면서 국제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3세기 후반에는 새로이 북방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후기에는 경국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중심국으로 성장하였는데, 대왕(大王)이란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화려한 금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룰 만한 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문화의 특징은 구덩식돌덧널무덤, 부드러운 곡선미의 다양한 토기, 많은 양의 철제무기류와 금, 은 상감기법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경남 김해의 대성동, 함안의 도항리, 합천의 옥전, 경복 고령의 지산리 등지에 있는 가야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수준 높은 가야문화를 보여준다.


신라

신라는 한반도 남동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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