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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초창기 교회 - 성서와 성례 |
조회수 : 2617 |
작성자 : 현대교회 |
작성일 : 2003-03-22 |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시작은 성서의 전파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할 때 그들은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죽을 때 성경을 나누어주었다는 것 등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그 선교에 있어서 카톨릭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카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890년대 말까지도 성경의 번역을 생각해 본 일도 없다.
그런데 서상륜을 비롯한 한국 최초의 신도들은 성경의 보급과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성경을 탐독하고 그 말씀 그대로 살려고 애를 많이 썼다.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연구하는 사경회가 우리 나라처럼 성대하게 진행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국제선교리뷰”는 한국 초대교회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첫 번째로 성경에 대한 강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말씀과 함께 한국 교회의 중추를 이루는 성례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세례는 1885년 이전에도 국외에서 여러 차례 집행된 적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비교적 성실하게 이행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886년6월24일 배제학당에서 두 사람의 한국 학생이 아펜셀러에게 세례를 받았고, 7월11일에는 “노도사”가 언더우드에게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국법을 거스리는 일로서 때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1887년 봄에 솔내교회에서 세 사람을 심사하여 세례식을 거행할 때에는 건강한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를 문밖에 세워서 망을 보게 할 정도였다. 1889년 4월27일에는 이른바 한국의 “요단강 세례”가 베풀어 졌다. 언더우 드가 신의주에 갔을 때 33명의 교인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국법 때문에 의주에서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에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세례는 그런대로 행해졌지만 성찬예식은 제대로 집행하지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 실시한 최초의 성찬식은 1885년7월23일 한국정부에 통보하고 공관안에서 영국과 미국사람들이 모여서 집행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이 최초로 성찬식에 참여한 것은 1887년 성탄절에 언더우드 목사의 집에서 였는데, 선교가 시작된 지 실로 3년8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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